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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아이 3 : 어른이 되는 법


아이유 - Someday







한동안 윤기는 바쁜 척을 하며 살았다. 실제로 바빴는지는 윤기 자신으로서도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지민에게 최대한 관심을 끄려 노력했다. 제 손으로 레포트란 것도 써보고, 몇 달간 소홀했던 정미도 만나고, 지민을 만난 후론 뜸했던 술자리에도 얼굴을 비추었다. 지민을 만나기 이전의 윤기로 사는 것은 쉬웠다. 20년 동안이나 그렇게 살아왔는데 어려우면 이상한 거였다. 그러는 동안 지민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뭐야. 금메달 따더니? 나 기다린 거?”


남준은 시험시간을 꽉 채우고 교수님과 함께 강의실을 나왔다. 시험이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답지를 제출한 윤기가 자신을 기다릴 것이라 생각지 못했는지 놀란 눈치였다. 사실 윤기는 남준을 기다린 게 아니었다. 복도 정수기에서 물을 먹다가 잠깐 생각에 잠겼고 정신을 차려보니 한 시간이 훌쩍 간 것뿐이었다. 윤기는 남준을 따라 상경대를 나왔다.


“쓰벌 존나 춥네.”


밖은 남준의 말대로 존나게 추웠다. 이번 겨울은 솔로들의 저주라도 받은 것인지 40년 만의 한파란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윤기는 정미가 떠준 빨간 목도리에 코를 묻다가 문득 겨울이면 동파가 된다던 어느 집의 수도꼭지가 생각났다. 설마 또 고장 난 건 아니겠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걱정까지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윤기는 철두철미한 인간이 아니었다. 이젠 거의 습관적으로 한숨을 내쉬는 윤기의 입술위로 하얀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윤기는 시선을 높여 하늘을 보았다. 눈이다.


“시험 끝나고 눈 오고 좋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남준은 잔뜩 짜증을 부리며 후드를 뒤집어썼다. 윤기와 남준은 학관으로 향했다. 동아리방에 전공 책들을 던져놓고 종강총회 전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먼저 시험이 끝난 동기들은 전날까지 밤을 샜는지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대낮부터 코를 골고 있었다. 동기들을 발로 밀어내고 들어간 동아리실은 보일러가 절절 끓었다. 윤기는 스토브 앞에 자리를 잡았다.


따듯한 주황빛을 내는 스토브 앞에 앉아 멍한 표정으로 온기를 쐬던 윤기의 등을 남준이 발로 깠다. 윤기는 화들짝 정신이 들어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리면서 남준에게 왜 지랄이냐고 물었고, 남준은 윤기보다 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짓으로 스토브를 가리켰다. 뭐.


“너 옷 다 타잖아.”

“…시발!”


정말이었다. 윤기가 입고 있던 갈색 코트 끝이 스토브의 열기에 맥반석 오징어처럼 오그라들었다. 이래서 인터넷 쇼핑은 안 돼. 개새끼들 양심을 판다더니 이게 양심이냐? 괜한 쇼핑몰에 화를 내는 윤기를 보던 남준은 윤기 들으라는 양 적나라한 한숨을 내쉬었다.


“민윤기.”

“…왜.”

“너 요즘 좀 병신같아.”


남준은 한 마디로 윤기의 상태를 정의했다. 윤기는 어떤 대꾸도 없이 코트 벗었다. 코트를 던지는 윤기의 손길이 거칠었는지 코트 주머니에서 윤기의 폰이 튀어나와 바닥을 굴렀다. 윤기는 대충 구긴 코트를 구석에 던져놓고 폰을 주워 홀드를 풀었다 잠갔다. 폰은 시계의 기능만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뭔 일 있으면 뭔 일 있다고 하든가.. 괜찮은 척 하려면 끝까지 괜찮은 척 하던가.”

“….”

“관종이냐?”


윤기는 확실히 예전과 같았다. 제 삶에서 지민을 빼니 오히려 더 쉬워졌다. 힘든 알바를 가지 않아도 됐고, 매일같이 124개나 되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할 필요도 없었으며, 누구의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팔자에도 없는 선생님노릇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오늘 여자애들 종강총회온대?”

“몰라. 오겠지.”

“정미랑 요즘 연락 안 해?”

“걔가 별로 안 좋아해.”

“누굴. 너를?”

“아, 몰라!”


아르바이트 마감을 하고 돌아오는 길 전화를 해주던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와 100번째 계단을 오를 때쯤에 보이는 설레는 파란 대문과 제가 사온 재료들로 마른 반찬을 만들어 내는 여윈 등과 제가 내준 문제를 풀던 하얀 손가락이… 윤기의 삶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것들은 윤기에게 좀 큰 의미였던 모양으로 윤기는 일상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짠한 공허함 때문에, 남준의 말처럼 병신같이… 정말 병신같이 굴고 있었다. 십새끼와 병신. 둘 중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이었을까 고민할수록 윤기는 더 지민에게 연락하기 어려워졌다.


“암튼 정신 좀 차리란 말이야.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박지민이 없는 삶이 쉬웠다는 건 사실… 허풍이다.












그냥 적당히 학교 앞 술집이나 갈 것이지. 하여튼 허세가 튄다. 튀어. 내내 죽상인 윤기의 옆구리를 남준이 푹 찔렀다. 아, 왜. 뭐. 윤기가 짜증스럽게 대꾸했고 그에 정미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남준은 윤기와 정미의 사이를 풀어주려 동분서주했지만 지가 큐피드도 아니고… 윤기와 정미의 사이는 그다지 진전이 없어보였다. 특히 윤기는 정미와의 관계에 있어 의지상실에 가까웠다.


“아무데나 가자니까.”


윤기의 혼잣말은 지나치게 볼륨이 컸다. 동기들 대부분이 아니꼬운 눈으로 윤기를 노려보았다. 윤기는 그 뾰족한 시선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분위기는 급물살을 탔다. 오랜만에 모인 동기 전원은 왁자지껄 회포를 풀었다. 이번 학기가 끝나면 군대를 가는 녀석도 몇몇 있었기 때문에 오늘따라 유난히 부어라마셔라가 심했다. 술집에 들어 온 지 한 시간도 안 되었는데 벌써 다들 취기가 올라 혀 꼬인 소리들이 넘쳐났다. 저기압인 윤기를 챙기던 남준은 1학기 때 썸타던 여자애와 다시 말이 잘 통했는지 착 달라붙어 손바닥 크기를 재보는 둥 꼴사나운 짓은 혼자 다 하는 중이었다. 윤기는 이 좋은 분위기에서 자작을 하는 자신의 꼴이 좀 우습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그들과 별로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윤기는 감성에 젖어 폰을 꺼내었다. 또 다시 홀드를 풀었다, 잠갔다. 여전히 폰엔 어떤 연락도 와 있지 않았다.


“야! 돌아돌아!”


조용히 비참한 기분을 곱씹고 싶던 윤기는 갑자기 우루루 일어나는 동기들에 떠밀려 옆으로 주춤주춤 엉덩이를 옮겼다. 뭐야 이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제 옆에는 정미가 와있었다. 무슨 게임이었나 보다. 윤기는 이런 건 제발 1학기 초에 졸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왁! 아씨! 깜짝아!”


가는 팔목의 윤기의 팔뚝을 뱀처럼 휘어 감았다. 정미였다. 윤기의 팔뚝에 정미가 달라붙어있었다. 정미는 이제까지 도도하게 윤기를 무시하던 태도는 어디 갔는지 눈가가 촉촉해져선 윤기의 이름을 길게 불렀다. 윤기야아아아아아아아. 이목이 집중되었다. 윤기는 하는 수 없이 대답을 해주었다. 왜.


“이 띱땍끼 너!”


누가 정미한테 자신이 십새끼 인걸 가르쳐 준 건지 모르겠다. 남준인가?


“띱땍끼 띠발롬!”


동기들이 눈을 반짝반짝 거리면서 정미와 윤기를 구경했다.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윤기는 팔뚝에 매미처럼 달라붙은 정미를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여자의 것이라 믿을 수 없는 힘이 윤기의 근육을 압박했다. 이제 좀 무서웠다. 정미가 눈을 위로 치켜뜨고 윤기의 팔뚝을 끌어안고 있었다. 야, 좀 놔봐. 야. 동기들은 신나서 웃었지만 윤기는 정미의 표정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열 몇 살 땐가 보았던 하나코라는 일본 호러 영화에서 귀신 표정이 딱 이 표정ㅡ


“여기 소주 4병만 더 주세요!”

“네~”

“이것 좀 놔보라니까?”

“넌 징쨔 띠발로미야!!!”


정미가 기어코 윤기의 팔뚝에 이빨을 박았다. 윤기는 화들짝 놀라면서 정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일어섰다. 그리고 뒤에 서 있던 누군가와 거세게 충돌했다. 쾅. 파직. 파격음이 들리고 윤기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었다. 아래를 먼저 내려다보았다. 서빙을 하던 종업원과 부딪힌 건지 소주병 하나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3병은 처참한 모습으로 깨져 있었다. 윤기는 당황스럽고 미안한 기분을 느끼면서 소주병 조각을 주웠다. 주황색 앞치마를 입은 종업원 역시 윤기를 도와 병조각을 주웠다. 그런데 정미가 또 말썽이었다. 쪼그린 윤기의 등 뒤로 엎어져서 윤기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는 바람에, 윤기는 하마터면 바닥에 흩어진 병조각에 안면이 갈릴 뻔했다.


“얘 좀 누가!”

“윤기야아아아아~”

“어?”


응?


윤기가 등 뒤에 정미를 이고 씨름하고 있을 때였다. 작게, 아주 작게, 들린 한 마디였지만 성능 좋은 윤기의 귀는 귀신같이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내었다. 윤기는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


한 뼘 차이로, 고작 한 뼘 거리에, 지민의 놀란 얼굴이 있었다. 윤기는 모았던 병조각을 후두둑 떨어뜨렸다.


“…박지민?”


윤기가 말 끝에 물음표가 붙은 이유는 지민이 입고 있는 옷 탓이었다. 아까 보았던 주황색 에이프런이 지민의 몸에 예쁘게 착용되어 있었다. 윤기는 눈으로 지민의 꼴을 스캔했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다. 볼이 쑥 패였네. 헬쓱한 지민의 모습이 윤기의 가슴에 찌릿한 통증을 유발했다.


윤기처럼 아니 어쩌면 윤기보다 더 당황한 지민은 눈동자를 쉴 새 없이 움직이다가 윤기와 마찬가지로 들고 있던 소주병 조각을 모조리 떨어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윤기 역시 지민을 따라 일어났다. 지민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더니 상황파악이 미흡해 저만 빤하게 쳐다보는 윤기를 두고 가게를 뛰쳐나갔다. 윤기는 지민이 나가고 3초가 지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박지민 저게 지금 여기서, 이, 호프집에서, 일을 한단 말이야?!












지민은 자신이 왜 도망가는지 몰랐으나 숨이 턱까지 아니 정수리까지 차오를 때 까지 뛰었다. 영하의 온도에도 불구하고 지민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에이프런이 거치적거려 쥐어뜯듯이 에이프런을 벗어 한 손에 쥐고 달렸다. 뒤를 돌아 볼 여유도 없었다. 윤기가 따라오는지 아닌지는 지민에게 아무 상관이 없었다. 지민은 그냥 도망가고 싶었다. 윤기가 있던 곳으로부터.


번화가를 한참 뛰고 있을 때 뒤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박지미인!!!!!!!!!!! 윤기의 포효였다. 지민은 윤기가 따라와 주었다는 안도감과 이대로 윤기에게 잡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는 모순적인 자신을 저주했다. 발은 여전히 빨랐다. 윤기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올 때 쯤 지민은 들고 뛰던 에이프런을 뒤로 던졌다. 악!! 윤기의 비명이 들렸다. 얼굴에 맞기라도 했나보다. 솔직히 미안함보다 고소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윤기는 얼굴을 뒤덮은 에이프런을 길바닥에 던지며 지민을 추격했다. 쥐새끼도 아닌데 어찌나 발이 빠른지 윤기는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폴짝폴짝폴짝. 지민은 잡힐 만하면 빠져나가고, 또 잡힐 만하면 빠져나갔다. 윤기는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막다른 골목… 은 아니고, 막다른 횡단보도였다. 골목 사이를 누비던 지민의 눈에 파란불로 바뀌는 신호등이 눈에 들어왔다. 지민은 질주했다. 아니, 질주하려는 데…


뿌아아아아아앙!!!


“헉!”


몸이 뒤로 휙 제껴지면서 엄청난 바람이 제 뒷목을 할퀴고 지나갔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경적소리 끝에 지민을 향한 것임에 분명한 운전자의 욕설이 섞여있었다. 지민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자신이 방금 어이없이 골로 갈 뻔했다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었는데, 자신을 꽉 끌어안고 있는 이 갈색코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민이 코를 묻었던 어깨에서 얼굴을 떼어내어 갈색코트의 주인을 마주봤다.


“…….”

“…너, 너!”

“…?”

“죽는다 진짜!!!!!”


윤기는 지민보다 더 놀랐는지 온 몸을 벌벌 떨면서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지민이 죽는 줄로만 알았다. 지민이 아까 그 차에 치였다면 그건 백타 자신이 따라붙어서 일거다. 윤기는 다리 힘이 풀려 휘청대면서도 혹여나 지민이 도망 갈까봐 팔로 지민을 꽉 죄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 이 자식아….


“이 쪼끄만 게 진짜 어른을….”


윤기는 공포에 질려 이빨까지 딱딱 부딪히며 떨었다. 지민은 창백한 윤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다가 단호한 동작으로 윤기를 밀어냈다. 지민과 윤기 사이로 하얀 눈송이 하나가 추락했다.


“왜 따라와요.”

“뭐?”

“왜 따라오냐구요.”


윤기는 할 수만 있다면 지민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지민의 얼굴이 저렇게 작지 않았다면 정말로 쥐어박았을 지도 모른다. 윤기는 무심한 눈으로 저를 흘기는 지민의 표정에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네가 도망가니까!!!!!!”


네가 그렇게 뛰쳐나가는 데 내가 어떻게 안 따라가. 아주 잡아달라는 듯이 그렇게 뛰는 데 내가 어떻게 멈춰. 윤기의 마음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이래서 안 보려고 했단 말이야. 너 보면 이렇게 된다니까.


“안 도망갈 테니까 따라오지 마요.”


지민은 윤기에게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윤기는 급한 동작으로 지민의 후드를 잡았다. 존나 카리스마있게 손목이나 팔뚝을 잡았으면 좋았을 걸 하필 잡은 게 후드라니. 지민은 가던 걸음 그대로 뒤로 끌려와 신경질을 냈다.


“왜 이래요!”

“너, 너! 거기 호프집이잖아! 너 왜 거기서 알바 해!”


윤기는 선생님처럼 말했다. 지민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윤기를 흘겼다. 지금 자기를 잡아 세워서 고작 한다는 말이?


“형이 무슨 상관이에요.”


윤기는 하마터면 아침드라마의 전형적인 아버지처럼 뒷목을 부여잡을 뻔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반항적인 지민의 모습에 없던 고혈압이 생길 것 같았다.


“무, 무슨 상관이냐니! 너 어린애가 그런 환경에서! 어!?”


지민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윤기는 몹시 당황을 했다.


“학, 학교는 어쨌어! 지금 야자시간 아냐!?”


지민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윤기는, 이번엔 진짜로 멋있게 지민의 팔목을 잡아채었으나, 지민이 손목을 비트는 바람에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허망한 꼴을 면할 수 없었다.


“악!”

“너 일단 따라와 봐.”


윤기는 다시 지민의 팔목을 잡았다. 말 안 듣는 딸을 보는 부모의 심정이 이럴까? 지민은 안 따라가겠다고 패악을 부렸다. 길가에서 남자둘이 쌩쑈를 하니까 지나가던 행인들이 흘끔흘끔 둘을 구경했다. 시발! 구경났냐? 돈 내고 봐!


“싫다고!”

“야! 너 진짜 왜이래!”


지민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이 쌓이기 시작하는 바닥에. 윤기는 당황해 지민을 일으키려 했지만 지민은 고집이 장난 아니었다.


“싫다고! 너 따라가기 싫어!”

“뭐어? 너?!”


윤기의 작은 눈이 튀어나올 기세로 커졌다. 지민은 배째란 식으로 소리를 반말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다신 안 보겠다며! 나도 너 다신 안 봐! 싫어!”

“…야.”


지민은 거세게 윤기를 거부했다. 지민이 뱉은 말에 충격을 받은 윤기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지나가던 행인1이 끼어들었다. 등치가 큰 남자였다. 정의감도 넘쳐보였다. 그리고 그 남자 눈에는 윤기가 어린 아이를 괴롭히는 악당쯤으로 보였나 보다. 제법 무서운 말투로 놓고 얘기합시다. 형씨. 하고 지민과 윤기 사이에 끼어들었다. 윤기가 주춤한 사이 지민은 폴짝 일어나더니 아까와 같은 속도로 사라졌다. 윤기는 그 뒤꽁무니를 따라가고 싶었으나 왜인지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윤기는 지민의 뒤를 쫓아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다음날 찾아간 지민이네 집 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124개나 되는 계단을 오른 윤기의 다리는 가만 서있기만해도 휘청거렸다. 윤기는 담장 너머를 보려고 까치발을 들었으나 보이는 건 왠지 허해 보이는 집뿐이었다. 저 안에 지민이 없어도 문제였지만 있어도 슬플 것 같았다. 집이 너무, 너무, 추워보였다. 윤기는 한참동안 집밖에서 기다렸다. 하루 종일. 문은 열리지 않았다.


윤기는 그 다음날도 지민이네 집에 갔다. 집은 어제와 같은 모양이었다. 윤기는 들고 온 핫팩에 손을 녹이면서 집 안쪽을 훔쳐보다 124번째 계단에 주저앉았다. 제 밑으로 123개나 되는 계단이 늘어서 있었다. 처음 지민이네 집에 과외를 하러 올 때 하도 궁금해서 세었던 것인데, 그 뒤로 습관이 되었는지 윤기는 지민이네 집에 올 때 마다 계단 수를 셌다. 꼭 70번째에서 지민이 보고 싶었다. 80번째에서 부터는 항상 뛰었다. 90번째는 윤기가 가장 힘들어하는 계단이었다. 그리고 100번째엔 이 대문이 보였는데….


윤기는 차가운 계단에서 일어났다. 동네를 내려가자마자 희망나눔회를 찾아갔다. 할머니들이 오랜만이라며 윤기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윤기는 지민의 안부를 물었다. 할머니들은 요즘 지민과 연락하지않냐며 조심스럽게 되물어왔다. 윤기는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들이 윤기에게 녹차를 주었다. 윤기는 언 손으로 종이컵을 받아들다 하마터면 차를 다 쏟을 뻔했다.


“예?”

“지민군이 말 안했나 보네. 지민이군 사정이 있어서 집을 옮겼어.”

“무, 무슨?”


윤기는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들도 모른단 표정이었다. 윤기는 녹차를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희망나눔회를 나왔다. 공기가 찼다. 윤기는 그 찬 공기를 가르며 지민을 만났던 호프집으로 달려갔다.


호프집사장은 영업시간도 되기 전에 와서 횡포를 부리는 윤기에게 화를 내었으나 윤기가 정신을 차리고 사정을 하자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지민이 그 날 이후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었다고 말해주었다. 윤기는 눈앞이 까마득해 지는 기분을 느꼈다. 혹여나 주소를 남겼을까 싶어 지민의 조악한 이력서까지 건네받았건만 주소는 그 파란 대문 집으로 되어있었다. 윤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민을 만나야만 하는데, 뾰족한 수가 없었다. 갈만한 곳도 생각나지 않고, 생각할 기운도 없어서 윤기는 지민이 떠났다는 그 파란 대문 집 124번째 계단에 앉아 하루 종일 지민을 기다렸다. 왠지 이곳에 있으면 지민이 올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하길 삼일, 윤기는 감기에 걸렸다. 하지만 ‘오늘은, 오늘은 올 거야.’하는 생각을 뿌리치지 못해 열에 달뜬 몸으로 파란대문집 앞에 섰다. 니미럴 오늘은 눈도 내렸다.


어깨에, 무릎에, 머리에 쌓이는 눈들을 힘없는 손으로 털어내던 윤기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이러다가 변사체로 발견되는 거 아냐?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채로 죽어있는 자신이 모습이 상상해 보았다. 개죽음이군.


윤기는 후회했다. 무엇이 그렇게 후회스러운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바로잡고 싶었다. 지민을 만난다면.. 다시 지민을 만날 수 있으면, 모든 걸, 말하고, 자신마저 외면했던 마지막 하나까지 모든 걸 털어놓고, 지민를, 만나면, 지민를, 만나면…. 자꾸 고개가 무거워져 윤기는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이런 데서 자는 건 돌덩이를 메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레벨의 자살행위라고 생각이 들긴 했지만 너무 춥고 힘들었다. 윤기의 등 위로 소복하게 쌓인 눈이 꼭 이불 같았다. 이젠 점점 눈도 감긴다.


“….”


게슴츠레하게 뜨여 진 윤기의 시야에 내리는 눈만큼 하얀 스니커즈의 앞 코가 들어왔다. 윤기는 그 깔끔한 앞코를 멍하게 응시하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잠이 다 달아났다.


“형 여기서.. 뭐해요.”


지민이었다. 이 되바라진 것은 타이밍도 대박이었다.


쫘악ㅡ


“….”

“….”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갔던 윤기의 팔이 지민의 뺨을 후려쳤다. 지민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꺾였다. 하얗게 질려있던 지민의 볼이 붉게 달아오른 건 순간이었다.


“너 왜 이렇게 애가 못됐어?!”


윤기는 제 자신도 놀랄 정도로 앙칼진 어조로 내질렀다. 지민은 뺨을 맞은 게 화나지도 않는지 말간 눈으로 윤기를 올려다보았다. 원래도 윤기가 컸지만 지민은 123번째 계단에 서 있어서 더 시선이 아래였다.


“넌 너 걱정하는 사람 생각 안 하냐?!”


지민은 대답이 없었다. 윤기는 이제 몸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감정을 표출했다. 사실 이렇게 화내려던 건 아닌데…


“왜!! 갑자기!! 왜!!”


이렇게 울려던 것도 아닌데…


“삐딱하게 굴어..”


난 왜 이렇게 병신 같을까.












윤기는 지민이 도망갈까 손을 꼭 붙들고 약국에 들렀다. 약국에서 종합감기약과 쌍화탕 2개 연고 하나를 샀다. 지민은 우악스럽게 손을 잡고 있는 윤기로부터 제 손을 빼내려고 꼼지락 거렸으나 그럴 때마다 윤기가 충혈 된 눈을 부릅떠 지민을 제지했다. 지민은 한숨을 쉬었다. 아, 손 아픈데….


윤기는 괜찮다는 지민의 손에 쌍화탕 하나를 쥐어주고 콜록콜록 거리면서 자기 몫의 감기약을 먹었다. 지민은 맛없는 쌍화탕을 홀짝거리다 윤기의 손에 얼굴을 잡혔다. 아야.. 아픈 볼에 닿은 윤기의 손 때문에 지민이 신음 소리를 내자 윤기는 제가 더 아픈 표정을 지으면서 연고를 짜 발라주었다. 그 손이 너무 간지러워서 지민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아파?”

“안 아파요.”

“아프라고 때린 건데.”


윤기는 마지막까지 꼼꼼히 연고를 발라주고 뚜껑을 닫았다. 훈훈한 온도의 약국 안에서 둘은 말없이 앉아있었다. 두 손님만 남겨둔 채 조제실 안쪽으로 들어간 약사는 소식이 없었다. 윤기는 바지에 연고 묻은 손가락을 슥슥 닦고 다시 지민의 손을 잡았다.


“…너 집 어떻게 된 거야?”

“미련하게 왜 거기 앉아있어요.”

“집 어떻게 된 거냐고.”

“몰라요.”


지민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윤기는 다시 열이 올랐다.


“네가 나한테 화난 게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너도 이건 알아야 돼!”

“….”

“난 네가 걱정 돼!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가끔이 아니라! 매일매일! 눈뜨고 있는 동안은 계속!”


윤기는 지민의 눈을 곧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지민의 심장이 진동했다. 지민은 침을 삼켰다.


“…아빠가….”

“…아빠?”


윤기는 되물었다. 아빠라니. 무슨? 너는 아빠가 없잖아. 윤기의 물음에는 그런 것들이 내포되어있었다. 지민은 그런 속뜻을 다 알았는지 차분하게 자기 얘기를 시작했다.


“사실 아빠가 있어요. 울 엄마랑 혼인신고도 안 했고.. 6살 때 이후론 보지도 못했으니까 아빠라고 하긴 좀 그런데.. 아무튼 아빠 같은 게 있긴 있어요.”

“….”

“방송에는 고아라하자 했어요. PD아저씨가.. 사생아라고 하는 편이 훨씬 불쌍해 보인다고..”


윤기는 그렁그렁하게 차오른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몇 년 만에 전화가 왔는데.. 그쪽 아들이 많이 아파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그래서?”

“돈 좀 보내달라고.. 오백만원정도..”

“그럼 그때 받아 적었던 게.. 계좌번호?”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지민 앞에서 윤기는 차마 울 수가 없었다. 우는 건 지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얘는 이렇게 열심히, 홀로, 이렇게나 선하게 살고 있었다. 고작 열여덟 밖에 안 된 주제에.


“집 보증금이 딱 오백이더라구요.”

“…너 지금은 그래서 어디, 어디 사는데?”

“이 골목 돌아가면 고시원 있는데 거기,”

“너 진짜!”


윤기는 지민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소리를 질렀다. 고시원이란다. 고시원. 윤기는 격해지는 감정을 겨우겨우 억누르며 한 마디 한 마디 씹듯이 내뱉었다.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그럼!”

“….”

“너 정말 내가 너네 집 안 간다 해서 말 안했던 거야!? 그것 때문에?!”

“그거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 그런 일 있으면 나한테 상의를!”

“미안해서 어떻게 말해요.”

“…뭐?”


지민이 어른스러운 눈으로 윤기를 쳐다보았다.


“형 맨날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거 아는데, 그래서 피곤해 하는 것도 다 아는 데 이런 것 까지 어떻게 말해요. 나도 사람인데.”


박지민. 너네 아빠를 봐. 세상 사람들을 좀 봐. 다들 남사정은 생각 않고 남의 피 빨아먹는데 혈안이 돼서 살아. 지민아. 넌 너무 사랑스러운데 그래서 답답하고 불쌍해. 윤기는 가슴을 팡팡쳤다. 지민이 어디 아픈 거냐고 다급하게 물었다. 윤기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지민의 어깨를 꽉 잡아 쥐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그거야!”

“네?”

“난 너한테 주는 걸 하고 싶다고!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돼!!! 나는, 나는…!”


네가 좋아…. 라고 하고 싶었는데,


“나는 너한테 주는 게 좋아….”


그게 돈이든 물건이든 뭐든..

혹은 마음이라도.. 다 너한테 주고 싶어.



윤기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지민을 제 쪽으로 당겼다. 윤기의 오른손이 지민의 뒤통수를 감싸 어깨로 끌어왔다. 한 치의 빈틈도 만들기 싫다는 듯 지민의 온 몸을 윤기가, 아주 세게, 끌어안았다. 지독할 정도로 따듯한 체온이었다. 부모의 품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그 뜨거운 온도에 지민은 제 온몸이 녹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얼음장 같던 지민의 마음이 조금 녹았는지 넘쳐 오른 물이 도로로 지민의 볼을 타고 떨어졌다.


“제발 의젓한 척 좀 하지 마... 애면 애답게 좀 살아..”


윤기는 불퉁하게 말했지만 그 따듯한 속뜻을 아는 지민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아.. 나랑 살자.”

“….”

“응? 나랑 살자. 그러자.”


윤기는 정말로 말하고 싶었다. 이 아이에게. 나한테는 어른인 척 하지 않아도 된다고 유치한 가사처럼, 뻔한 대사처럼.. 꼭 말하고 싶었다.


나한테는… 기대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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