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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아이 4 : 어른이 사랑할 때


아이유 - Someday







윤기는 원래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가려했다. 그래서 보증금 4000에 월세 50인 학교 앞 풀옵션 원룸에서 자취를 했다. 집도 그렇고, 씀씀이도 그렇고.. 동기들은 공공연히 윤기를 금수저 취급했다. 윤기도 자신의 가정형편이 보통사람들보다 풍족하다는 자각은 있었다. 한번은 남준 앞에서 통장정리를 했다가 통장에 찍힌 생활비 금액을 보고 남준이 기함을 한 적도 있다.


‘같이 살자.’


지민에게 기세 좋게 말하긴 했지만 윤기의 원룸은 말만한 남자 둘을 수용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윤기는 부모님한테 대학원에 가고 싶다는 헛소릴 했다. 부모님은 생전 안 들던 공부바람이 든 아들을 낯설어 하면서도 윤기의 헛소리에 의심을 품지는 않으셨다. 윤기는 마마론을 이용해 전세계약을 했다. 그 과정에서 윤기는 자취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만큼 다니는 대학과 멀어지긴 했지만 지민이 등굣길에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민과의 동거는 두근거림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두근거림은 윤기가 지민에게 사심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기도 했으므로 윤기는 삭은 동아줄로 외줄타기를 하는 광대의 심정이 되어 집 안에서도 정신을 바짝, 아주 바짝, 차릴 수밖에 없었다.


“숨은 쉬고 있는 거지?”

“간신히.”


윤기는 거짓말 조금보태 숟가락 들 기운도 없었다. 어제도 거의 밤을 새다시피 했다. 이런 상태가 몇 달만 더 지속된다면 돌연사가 영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기는 살기위해 밥알을 씹었다. 남준은 그런 윤기 옆에서 계속 깐족댔다.


“너 무슨 호빠같은 거 뛰어?”


남준이 받아 온 국그릇에 코를 처박으며 물었다. 호빠라니. 윤기는 자신의 고충을 1그람도 이해하지 못하는 남준에게 짜증스런 기분을 느꼈으나 뭐라 대꾸할 기운도 없어서 하던 저작운동이나 마저 했다. 자신 꼴이 말이 아니긴 한가보다.


“갑자기 집 옮기고, 어딘지도 안 가르쳐 주고, 여섯 시 이후엔 연락도 안 되는 주제에 아침만 되면 퀭해서 좀비처럼 기어 오고… 너 무슨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거냐?”


남준의 말이 구구절절 맞았다. 지민을 끼고 살면 마냥 안심이 되고 좋을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윤기에게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남아있었다. 그것들은 지민과 살림을 합친 시점부터 내도록 윤기를 괴롭혔다.


“좋은 일하느라 그런 거거든?”

“밤에 하는 일치고 좋은 일이 어디 있냐? 네가 천사 소녀 네티도 아니고.”










김남준의 통찰력은 탁월했다. 남준의 말대로 윤기는 불쌍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천사소녀 네티가 아니었다. 지민에게 욕심을 낸다면 못 낼 것도 없었다. 그리고 확실히 상황은 윤기에게 유리했다. 지민은 돈 없고, 집 없고, 가족은커녕 돌봐 줄 사람도 없는… 처량한 상태였다. 물론 윤기는 지민의 딱한 처지를 제 입맛대로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현재로서 지민이 의지할 사람이 윤기밖에 없다는 건.. 윤기에게 나쁠 것은 없었다. 어쩌면, 윤기가 움켜쥐기만 하면, 아니 살짝 잡아채기만 해도, 지민은 우르르 무너질 지도 모른다.


근데 어째서 자신은 망설이는가?


“지민아.”


이 시간에 지민이 집에 있을 리는 없지만 현관을 들어서며 윤기는 괜히 한번 지민의 이름을 불렀다. 집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지민이 냉기 폴폴 풍기는 집에 귀가하는 게 싫었던 윤기는 보일러를 24시간 내내 틀어놓았고 덕분에 집 안이 훈훈했다. 윤기는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힘없는 손으로 풀어내며 가방을 내던졌다. 밀려오는 수마를 도저히 못 참겠어서 남준에게 대출을 부탁하고 오는 길이었다. 시계는 3시를 가리켰다. 지민이 야자를 하지 않고 와도 7시 정도니 그때까지 푹 자둘 생각으로 윤기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싱글 베드에 몸을 뉘였다. 얼마 만에 비벼보는 매트리스인가. 극구 사양하는 지민에게 침대를 내어 주고 바닥 생활을 하는 윤기는 20년 만에 자신은 침대가 아니면 잘 수 없는 체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 잠이 안 오는 이유는 그거 하나가 아니지만.. 어쨌든.


베개에서 은은하게 샴푸냄새가 났다. 지민은 머리를 잘 말리지 않고 눕는 편인데 그래서 냄새가 뱄나 보다. 분명 자신과 같은 샴푸냄새 일 텐데도 묘하게 다른 느낌에 윤기는 베개에 코를 묻으며 발가락을 오그라뜨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아우터를 벗지 않고 이불 속으로 드러누워서인지 등에 땀이 조금씩 고이기 시작했다. 윤기는 더웠다. 눈을 감은 채로 허우적거리며 겨우 야상을 벗어 던졌는데 그래도 더웠다. 가디건도 쥐어뜯다시피 벗어내니 좀 나았다. 개운해진 윤기가 다시 수마에 이끌려 꿈속으로 향할 때였다. 윤기의 발걸음을 잡아채는 문소리가 들렸다. 철컥.


“다녀 왔습니-”


지민이 왔나보다. 아니 지민이 왔나? 윤기는 현실과 꿈에 한 발짝씩 발을 걸친 채로 갈팡질팡했다. 그동안 너무 피곤했나보다. 지민 목소리도 무시하고 다시 자고 싶은 마음이 반, 얼른 몸을 일으켜 저녁을 차려주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어찌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훅- 지민의 샴푸향기가 났다.


“…자요?”


이젠 일어나지도 못하겠다. 얼굴과 가까운 쪽에서 지민의 숨이 느껴졌다. 윤기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그와 함께 잠도 달아났다. 눈을 뜨지도 않았는데 지민의 눈동자가 어디에 닿아있는지 다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젠 더워서 흘리는 땀 말고 식은땀이 났다.


“무슨 땀을 이렇게..”


지민이 손가락으로 윤기의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윤기는 순간적으로 지민의 손목을 잡아챌 뻔했으나 20년 동안 갈고닦은 침착함으로 참아내고 계속 자는 척을 했다. 대충 구경을 했으면 이제 가서 옷이나 갈아입을 것이지 지민은 윤기 옆에 앉아서 떠나 줄을 몰랐다. 앞이 보이질 않으니 지민이 어떤 표정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냥 이쯤에서 눈을 뜰까, 어쩔까.. 고민하던 윤기는, 다음 순간 혀를 깨물 뻔 했다.


“….”

“…!”


안 그러려고 노력했지만 윤기의 어깨가 작게 움찔했다. 지민이 갑자기 윤기의 가슴에 얼굴을 올린 탓이다. 윤기의 심장박동이 숨길 수 없이 빨라졌다. 지민은 누워있는 윤기의 가슴팍에 코를 비볐다. 윤기는 울고 싶었다. 얘, 얘가 왜, 왜 이러지. 가지런히 눕혀진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


“…형.”


도대체 어쩌려고 저런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지 모르겠다. 이러다가 내가 벌떡 일어나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윤기는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지민은 한참 동안 그 자세 그대로 윤기의 애를 태웠다. 마치 새끼강아지가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윤기의 가슴팍에 달라붙어서 부슬부슬한 머리를 문대었다. 처음엔 미칠 것 같았던 윤기도 어느 순간부턴 빳빳하게 굳은 몸을 이완시켰다. 지민의 행동에 사심이나 성적인 의도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박지민은 그냥, 그냥 애정이 필요한 거다. 만져주고, 보듬어 주고, 애교를 부릴 만한 대상이… 지민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윤기는 문제의 새벽, 제 팔 안으로 굴러 들어왔던 지민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그때도 아마 그런 마음으로 제 품을 파고든 것 일 것이다. 윤기는 새삼스레 지민이 얼마나 애정에 굶주려 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지민에게 욕정 하는 자신은 정말 문제가 있다는 것도.


일어나면 지민이 싫다 해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윤기는 바짝 세웠던 경계심을 느슨히 했다. 윤기에게 다시 잠이 몰려온 것은 순간이었다.












“딸꾹.”

“아직도 해요?”


윤기는 몇 잔째인지도 모르는 물을 원샷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나름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는데 물배가 빵빵해서 하나도 손을 못 대겠다. 그러는 새에 딸꾹질이 한 번 더 나왔다. 꾹. 아 미치겠네, 이거 왜 안 그쳐.


지민의 머리를 가슴팍에 얹어둔 채 잠이든 윤기는 자신의 팔이 점점 저려옴을 느꼈다. 윤기에게 익숙한 감각이었다. 윤기는 혹시~ 설마~ 하는 마음에 눈을 번쩍 뜨지도 못하고 조금씩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실금 같은 시야사이로 지민의 가지런한 속눈썹이 보였을 때, 윤기는 소리도 못 지르고 딸꾹질을 했다. 지민이 제 품에 얼굴을 박은 채로 쌕쌕 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윤기가 세 번째 딸꾹질을 시작했을 무렵 지민이 일어났다. 지민은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부스스 일어나서 딸꾹질을 하는 윤기에게 물 한 컵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 후로 1시간이 지났다.


“야 나 밥 못 먹겠, 꾹.”


윤기는 문장을 다 완성하지도 못 하고 숟가락을 놨다. 이렇게 오래 딸꾹질을 한 적은 처음이다. 무려 3분 동안 숨도 참아봤는데 소용이 없다.


“형형 이거 안 쉬고 다 마시면 괜찮을 지도 몰라요.”


지민이 건넨 것은 1.5L짜리 물병이었다. 뭔가 석연치 않았으나 지민의 표정이 결연해서 윤기는 하는 수 없이 주둥이에 입을 댔다. 꼴깍꼴깍꼴깍. 배가 터질 것 같은데도 쉼 없이 물을 삼켰다. 큭. 그럼 그렇지. 심하게 사레가 들렸다. 지민은 윤기의 신음을 듣지 못했는지 물병을 윤기 주둥이 깊숙이 욱여넣으며 다 마시라고 충고를 했다. 결국 못 견딘 윤기가 물병에서 입을 떼었고 콸콸콸 쏟아진 물이 윤기의 입구멍이고 콧구멍이고 모조리 침투해서 윤기를 괴롭게 했다.


“푸하!”

“괜찮아요?”

“괜찮긴! 물고문 시키냐?!”


하도 놀라서 말이 사납게 나갔다. 윤기 주변은 난리도 아니었다. 아이가 물장난 쳐 놓은 것 마냥 바닥과 옷 꼴이 난장판이었다. 그러는 새에 윤기는 한 번 더 딸꾹질을 했다. 이만하면 좀 그칠 법도 한 데 끈질겼다.


“딸꾹질 멈추기 전에 토할 것 같아.”


윤기는 지금 자신의 배를 누르면 배꼽에서 고래처럼 물이 뿜어져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꾹.”

“형 그거 알아요?”

“딸꾹질 말이에요. 천 번인가? 백 번인가?”

“무슨 소리, 꾹, 야?”

“천 번 딸꾹질하면 죽는 거 몰라요?”

“뭐? 진짜?”


윤기는 순진하게 손가락을 들어 자신이 이제까지 딸꾹질을 몇 번이나 했나 세었다. 그러는 새에 딸꾹질은 두 번이나 더 나왔다. 와씨! 이게 무슨? 못해도 구백 번은 한 것 같다. 윤기는 안색이 창백해 져서 지민을 쳐다봤다. 제발 장난이라고 해주길 바라며. 하지만 지민은 윤기를 제대로 놀리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아님 아까 한 말이 진짠지… 여전히 심각한 얼굴이었다.


“맞을 걸요. 천 번하면 죽는대요.”

“뭐야, 그런 게 어딨, 꾹, 어?!”

“몰라요. 저도 옛날에 들은 얘기에요.”


지민은 지 목숨 아니라고 쿨하게 출처를 정리하며 밥상을 치웠다. 윤기는 저딴 소리가 진짜일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마음이 불안해 손으로 입을 막고 숨을 참았다. 꾹.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박지민, 나, 죽음, 꾹, 어떻게 해?”


윤기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설거지를 시작한 지민 옆을 배회하며 징징댔다. 농담이에요. 그 말 한 마디면 됐는데 이 깜찍한 것은 입을 꾹 다물고 윤기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윤기는 의외로 소심했다. 미신도 잘 믿고.


“구백 번 훨씬 넘은 것 같아. 꾹.”


대충 계산을 해보니 5초에 한 번꼴로 1분이면 12번. 60분이면 720번이다. 지금은 자신이 일어나서 딸꾹질 한지 1시간 20분 정도 된 상태이니 못해도 900번의 딸꾹질은 했을 거다. 발을 동동 구르며 깨방정을 떠는 윤기를 두고 지민은 고무장갑을 낀 채 여유롭게 설거지를 했다.


“그거 어디서, 꾹, 들었어?”

“모른다니까요.”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무슨 전설이야? 설화야? 민담이야? 어? 꾹.”


뭐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불안한지 모르겠다. 자신이 죽으면 지민이 혼자 남겨질 것 같아서 그런가? 라고 어이없는 추측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다.


“꾹.”

“설마 진짜로 죽겠-”

“나 죽으면 이 집 너 가져.”


지민이 그제 서야 그릇에서 눈을 떼고 윤기를 쳐다보았다. 지민의 얼굴은 이게 무슨 개소리야?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집 너 가지라고. 꾹.”


딸꾹질을 하지 않았으면 존나 멋있는 대사였을 텐데!


“….”

“…꾹.”

“전세인데 가지긴 뭘 가져요….”


맞아. 그건 그렇다.


“그리고 통장도 너 가져. 꾹. 참고로 말하지만 200밖에 없어. 꾹”


큰돈은 아니고 그 마저도 담 학기 등록금이랍시고 쟁여둔 것을 야금야금 쓰고 남은 돈이지만 어쨌든 죽으면 소용없으니까.


“통장 비밀번호는 공삼공구 내 생, 꾹, 일이야.”

“….”

“꾹, 내 물건은 다 내다 팔아도 상관없어.”


세간에 보탬 된다면 그러도록 해. 윤기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구백 구십 번도 넘은 것 같다. 진짜로 죽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윤기는 뭐에 쫓기듯 급하게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다. 지민의 빨간 고무장갑에 달라붙어있던 퐁퐁 거품이 스르르 흘려내려 싱크대 안으로 떨어졌다. 지민은 그만큼 넋 나가 있었다. 윤기는 지민이 틀어놓은 싱크대 수도꼭지를 잠갔다.


“…형 천 번 다 되가는 것 같아요.”

“나도, 꾹, 알아.”


그 짧은 새에 길지 않았던 인생을 마감하고 가장 마음 쓰이는 지민에게 모든 것을 양도한 윤기는 편한 마음으로 싱크대에 몸을 기대었다. 지민은 그런 윤기를 빤히 주시했다. 눈빛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윤기는 뒷목이 간지러웠다. 왜 저렇게 보지?


“……딸꾹질 멈추는 법 가르쳐 줄까요?”

“어. 근데 물고문은 사양할,”


게…. 라는 마지막 말은 따듯한 동굴 안으로 먹혀들어갔다. 아주 습하고, 뜨겁고, 작은 동굴이었다. 지민이 가르쳐주는 딸꾹질 멈추는 방법은 별 거 아니었다. 물고문처럼 괴롭지도 않았고 숨 참기처럼 무식하지도 않았다. 그건 그냥…… 키스였다.


정정한다. 사실 ‘그냥 키스’는 아니어서 지민의 입술이 윤기의 입술에 닿은 순간 윤기의 뇌에서는 천지창조가 시작되었다. 지민을 기반으로 새로운 세계가 세워지는 놀라운 장면이 눈앞에 보일 듯이 선명했다.


기적이었다.


황무지에 잔디가 돋아나고 그 초록융단 위로 연두색 봉우리가 맺히고 이윽고 꽃들이 팡팡 봉우리를 터뜨리며 피어났다. 새들이 지저귀고, 그럴 리 없는 데도 코끝에 꽃향기가 맴돌았다. 지민이 서툴게 입술을 움직일 때 마다 그랬다.


지민은 윤기의 황무지를 온통 꽃동산으로 만든 다음에야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 내었다. 지민이 물기가 가득한 고무장갑을 낀 채 윤기의 가슴팍을 잡고 있었던 탓에 윤기의 옷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윤기는 흡사 빚쟁이들에게 멱살잡이를 당한 모양새였다. 윤기의 표정 역시 너갱이가 한참 빠져있어 진짜 그럴싸해 보였다. 지민은 입술을 떨어뜨리며 감고 있던 눈꺼풀을 스르르 들어 올렸다. 그 장면이 너무 영화 같아서 윤기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윤기와 지민의 입 사이에 채 갈무리 되지 않은 침이 거미줄처럼 늘어졌다. 지민은 당돌한 눈으로 윤기를 올려다보면서 통통한 입술을 촉촉이 적시고 있는 침을 스윽 닦아냈다. 고무장갑에 묻어있던 퐁퐁 거품이 지민의 입술 옆에 묻었다. 윤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것을 닦아내 주었다. 지민은 이제껏 태연한 척 했던 주제에 흠칫 놀라서 몸을 움찔했다. 뭘까.. 지금 이 상황은?


“…딸꾹질 멈춘 것 같아….”


차마 ‘그 방법이 키스였어?’라고 물을 순 없었다. 지민은 윤기에게 한 걸음 물러서며 싱크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다시 물을 틀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이라고 생각한 순간 지민의 손에서 미끄러진 컵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지민은 덜덜 떠는 손에서 고무장갑을 빼내고 수도를 잠갔다.


“그냥,”

“….”

“딴 사람한테 옮기면 돼요.”


히끅. 지민이 말끝에 그런 소리를 내며 거실로 달아났다.














요 며칠 윤기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했다. 그 날, 지민과 윤기가 딸꾹질을 빌미로 한 행위는 명백히 키스였고 아무리 봐줘도 입맞춤이었다. 것도 지민이 먼저 한. 윤기는 그 행위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아 또 불면의 밤들을 보냈다. 배점 4점짜리 영어독해 문제를 만난 기분이었다. 키스라니, 키스라니.


윤기는 지민의 마음에 대해서 어느 것도 확신 할 수 없으나 하나만은 확실했다. 지민이 정말 딸꾹질을 멈추게 해 줄 생각으로 입을 맞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지민이 키스를 한 이유는 뭘까? 윤기는 자신이 은연중에 지민에게 성적인 행동을 강요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봤다. 왠지.. 무의식중에 그런 뉘앙스가 풍기는 말이나 제스츄어를 한 것 같기도 했다. 윤기는 경악했다. 안 그래도 자신에게 빚을 지고 있다 생각하는 지민이다. 자신이 생각 없이 툭 내뱉은 말 한 마디에도 집에서 쫓겨나는 건 아닐까, 자신을 또 버리는 건 아닐까 전전긍긍하지 않았을까? 같은 맥락으로 자신의 사심을 읽고 지민이 알아서 성..성..납..을 한 것을 아닐까!?!?!? 진짜 그런 거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오해를 풀지?!?!?!?!? 윤기의 망상은 커져만 갔다. 윤기는 지민이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곤 죽어도 생각지 않았다.


사실 윤기가 윤기답지 않게 헛물을 켜고 있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윤기는 지민이 게이라면 달가울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적소수자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크게 진보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도 동성애는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다. 윤기는 지민의 인생길이 실크로드까지는 못 되어도 가시밭길은 아니길 바랐다. 작은 돌부리라도 보이면 자신이 발로 차서 치워줄 의사까지 있었다. 그런 지민이 게이라니. 윤기는 지민을 마음에 둔 주제에 지민이 게이인 것은 말리고 싶었다. 못 말리는 부모병에 걸려버린 것이다. 지민을 성적인 대상으로 보면서도 지켜줘야 할 내 새끼로 보는 윤기의 두 가지 상반된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충돌을 했고 그럴수록 ‘답’은 윤기에게서 더 멀어져 갔다.


그리고 그런 고민은 윤기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었던 모양인지,


“….”

“박지민.”

“에?!”

“다 탔는데, 그거.”


지민이 급하게 가스레인지 불을 껐으나 이미 늦었다. 후라이팬 위 꽁치는 생선이라기보다는 숯에 가까운 비쥬얼로 하얀 연기를 내뿜었다.


지민은 겉으로는 별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뗐지만 윤기보다 상태가 더 심각했다. 며칠 새에 지민이 깨뜨린 식기는 십 단위를 넘어섰고, 저번에는 가스 불을 켜놓고 등교를 하지 않나, 윤기가 부를 때까지 넋 나가 있는 것은 기본이고, 공부를 가르쳐 줄 때도 알맹이만 책상 앞에 앉아있을 뿐이지 영혼은 이탈상태여서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따 금씩 윤기와 몸이 닿으면


“아!”


윤기가 환풍을 위해 부엌에 딸린 쪽창문을 열다 살짝 지민을 건드렸다. 지민은 후다닥 떨어지며 허우적댔고 그러다 달궈진 프라이팬에 팔꿈치를 부딪쳤다. 씁- 지민이 아픈 소리를 냈다.


“너!”


벌써부터 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팔꿈치를 보며 윤기가 속상해서 한 소리하려 했는데 지민이 윤기에게 잡힌 팔을 야멸차게 빼내었다. 손이 휑해진 윤기는 어이가 없어 지민을 쳐다보았다. 지민은 윤기의 눈도 쳐다보지 않고 거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봐봐.”


윤기가 다시 손을 뻗으려 하자 지민이 한 걸음 물러났다.


“괜찮아요.”

“일단 좀 보자.”


윤기가 다시 손을 뻗자 지민이 팔을 아예 뒤로 숨겨버렸다. 이게 도대체 뭐하자는 건가 싶었다.


“왜 그래 너?”

“괜찮다니까요.”

“괜찮은 지 아닌지는 내가 봐야 알아. 이리 내봐.”


윤기가 손을 뒤로 뻗자 지민은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윤기도 오기가 들어 지민에게 달려들었다. 지민이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치다 주방 매트를 잘 못 디뎌 미끄러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윤기는 가스렌지 밖으로 삐죽하게 튀어나와있던 프라이팬 손잡이 부분을 난폭하게 건드렸다.


“헉!”


윤기는 넘어지는 지민의 머리를 반사적으로 감싸 안았다. 윤기의 어깨에 알싸한 고통이 퍼졌다. 프라이팬이 어깨에 떨어진 탓이었다. 그나마 어깨라서 다행이지 머리나 맨살이 닿는 부분이었으면 화상을 입을 뻔했다. 옆을 보니 숯덩이가 된 꽁치 세 마리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윤기는 품 안을 내려다보았다. 엉덩방아를 찧은 지민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지민은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으면서 끙 앓다가 코앞에 있는 윤기의 얼굴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고 그 옆에서 연기를 내며 바닥장판을 다 태우고 있는 프라이팬을 보고는 경악을 했다.


“혀, 형.”

“너 자꾸 왜 그래! 불안하게!”


지민은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윤기의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지민은 안심했다. 윤기는 어째서인지 일어서질 않고 지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윤기의 눈동자는 원래도 예쁘지만 지금은 그 뿐만 아니라 끝을 알 수 없이 깊었다. 지민이 어설프게 윤기의 시선을 피하려 눈을 내리 깔았다. 윤기의 시선은 지민의 눈을 추적했다. 윤기가 얼굴을 가깝게 들이댄 탓에 어느새 두 눈동자 사이의 거리는 새끼손가락 하나가 드나들기도 힘들만큼 가까웠다.


“…뭐해요.”


지민의 입에서 기어코 그런 소리가 나왔다.


“몰라.. 나도.”


바람이 불어왔다. 차갑고 메마른 겨울바람이 아니라, 일전에 지민이 꽃피웠던 윤기의 동산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탄 생선냄새가 아니라, 옅은 꽃향기가 났다. 윤기는 그 꽃향기를 쫓았다. 그러다 보니 윤기의 혀는 자연스럽게 지민의 혀를 리드하고 있었다. 지민이 윤기의 옷깃을 잡아 쥐었다. 키스는 들꽃처럼 수줍게 시작해서 장미꽃처럼 화려하게 끝났다. 지민은 숨이 부족했는지 내내 헐떡이면서도 윤기의 페이스를 열심히 따라왔다. 으으음. 지민이 앓는 소리를 낼 때마다 윤기는 온 몸의 털이 기립하는 선뜩한 흥분에 더 지민을 몰아붙였다.


윤기의 머릿속에서 이제 까지 윤기를 묶어두었던 도덕과 양심 같은 것들이 하얗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꽃은 윤기의 뇌를 다 태울 것처럼 격렬하게 춤을 췄다. 이윽고 뿌연 잿더미로 가득해져버린 공간에서 살아남은 것은 흥분뿐이었다. 윤기는 본능에 따라 지민의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팍-


“억!”


가슴을 쳐내는 주먹에 윤기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지민이 윤기의 명치를 가격한 탓이었다. 야! 급소야! 거기! 잘못 맞으면 죽는다고! 윤기가 놀라서 지민을 쳐다봤다. 지민은 손등으로 입술을 막고 있었다. 지민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한 게 심상치 않았다. 사실 윤기는 지민의 허리에만 손을 올렸을 뿐이지 맨 살은 만져보지도 못했는데 지민의 반응이 너무, 다이나믹했다.


지민은 이젠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윤기를 노려보았다. 윤기는 어쩔 줄을 몰랐다. 까놓고 말해 자기도 신나서 쪽쪽 빨아놓고 왜 갑자기 저러는 건지 당황스러웠다. 자세한 이유야 어찌 됐던 지민의 저런 반응이 윤기 탓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보였다. 윤기는 무릎걸음으로 천천히 지민에게 다가갔다. 지민은 피하지도 않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윤기를 흘겼다.


“왜, 왜그래. 놀랐어?”


윤기가 손을 뻗자 지민이 윤기의 손바닥을 쳐내었다. 윤기는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대체 왜 그러는!


“형 너무!”

“응?”

“너무... 잘해요.”


지민은 그 말만 하고 벌떡 일어나 일전처럼 거실로 도망을 쳤다. 윤기가 지민을 잡을 생각도 못하고 어리버리하게 주저앉아 있는 사이, 현관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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