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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 연애담 1

“나는 불행한 사람이야.”


앉은뱅이 책상위에는 하이네켄 네 병과 족발이 열 맞춰 세팅되어있다. 띵! 태형이가 전자렌지에서 어제 먹다 남은 마라핫을 꺼내왔다. 오늘은 챔스 결승 날이다. 태태의 자취방은 벗어던진 옷가지들로 조금 정신 사납긴 했지만 그래도 신축건물답게 깨끗하고 넓다. 여기에 호날두의 모공까지 보여줄 기세인 40인치 UHD TV, 3시간째 뺑뺑 돌아가고 있는 에어컨, 완벽한 조합의 야식 그리고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 금수저 김태형의 인심까지! 뭐 하나 쾌적하지 않은 것이 없는 가운데


“아무리 생각해도 윤기 형은 날 안 좋아해.”

“왜 또.”


내 불쾌지수는 정점을 찍었다. 태형이가 숟가락으로 병뚜껑을 따면서 심드렁하게 물었다.


“이걸 보라구!”


나는 병맥을 나발로 부는 태형이의 눈앞에 폰을 들이 밀었다.


[형형형 저 오늘 태태장에서 챔스보고 1교시가려구여]-오전2:03

[ㅇㅇ 낼 봐]-오전2:24


“이게 뭐?”


너도 민윤기랑 똑같은 인간이었냐!


“지금 애인이 다른 사람 집에서 잠을 잔다는데! 반응이! 어? 이응 두 개가! 말이 돼?”

“너랑 나랑 친구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보통은, 보통은!”


보통은 화나서 폰에 불날 때까지 전화해야 정상 아니야? 난 윤기 형이 김남준이랑 당구치러 간다고만 해도 열이 받아 죽겠는데!


“윤기 형은 노말이잖아. 많은 걸 기대하지 마. 아.. 매워.”


스읍스읍. 태형이는 치킨 때문에 팅팅하게 부어오른 입술을 페트병 주둥이에 드밀었다. 탄산이 가득한 콜라를 꼴깍꼴깍 잘도 넘긴다.


“악! 짜증나.. 그게 짜증나.”


우울해. 이래서 엄마가 누나한테 무뚝뚝한 남자랑 연애하지 말라 했나봐. 태형이가 짜증내봤자 너만 손해라면서 족발에 새우젓을 콕 찍어 입에 넣어줬다. ..맛있네.


“지민아. 여기 봐봐.”


태형이는 요즘 한창 인스타그램에 빠져있다. 그래서 뭐만하면 사진으로 기록을 남긴다. 기분은 내키지 않았지만 프로인스타그래머가 되기 위해 족발을 들고 전위적인 포즈를 취해줬다. 김태형이 꺽꺽 거리면서 뒤로 넘어갔다. 태형이는 보정도 안한 사진을 연달아 업로드하고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결승전 대기를 위해 틀어놓은 채널에서 찐한 베드씬이 나왔다. 나는 문득 세어봤다. 형과 내가 사귄지.. 삼개월 째구나.


“나 엄청 쌓였어 태형아.”

“엄한 사람한테 끼 부리지 마.”


뭔 끼?


“끼 부리는 거 아니고 사실을 말하는 거야.”


윤기 형 직전의 연애는 수능과 함께 끝이 났다. 그리고 3개월을 쉬다가 학교 OT에서 윤기 형을 봤다. OT 자체는 드럽게 재미도 감동도 없었다. 일단 너무 추웠고, 추웠는데.. 또 추웠다. 강원도 산골짝에 선배들이 과잠바 외의 외투는 허용을 안 해서 더 추웠다. 설상가상으로 마지막 날에는 눈까지 왔다. 과대가 정강이까지 눈이 쌓인 운동장에서 캠프파이어를 한다고 그랬다. 태형이랑 나는 화장실에 숨어있을까 고민하다가 끌려나왔다. 밖은 하늘이 노하셨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그 위에 태형이가 건네준 목도리를 칭칭 감아 눈만 빼꼼 내놓았다. 여기저기서 원성이 들리는 가운데 선배들의 축하공연이 시작되었다. 퍼와 핫팬츠를 입은 댄스동아리 여자선배들이 최악의 기상조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격렬히 트월킹을 했다. 춤만 추는 줄 알았는데 합동공연이었는지 보컬이 노래를 시작하더니 이윽고 랩퍼들이 등장했다. 그중에 윤기 형이 있었다. 윤기 형은 단연 돋보이는 보이스와 딕션으로 영하 20도의 산골을 핫하게 달궜다. 공연을 마친 윤기 형이 퇴장하면서 강렬하게 군중을 쏘아보았다. 그 한방에 나는 완전히 K.O 당했다.


그 후 1년을 윤기형 뒤꽁무니만 쫓아다녔다. 공대에 소문이 쫙 퍼질 정도로 유난스럽게 형을 따랐다. 매사에 무심한 윤기 형이 날 의식하기 시작했을 때 충동적으로 형에게 고백했다. 일말의 여지도 없이 쌩스트레잇인 형은 몹시 당황해하면서 내 고백을 거절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기에 별로 충격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한 번 고백하니까 그 다음은 쉬웠다. 도합 열네 번의 고백을 한 것 같다. 마지막 고백은 이번 학기 개총날이었다. 긴 겨울방학 내내 얼굴한번 보지 못했던 형이 맞은편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으니까 기분이 한껏 센치해졌던 걸로 기억한다. 술이 좀 돼서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떠보니 어느새 우리 테이블에는 나랑 태형이 그리고 남준이형이랑 윤기 형만 남아있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윤기 형에게 반쯤 꼬장부리듯이 말했다. “이쯤 했으면 그냥 사귀어 주시죠!”. 태형이는 빵터졌고 남준이형은 먹던 술을 뿜었다. 그리고 윤기 형은.. 윤기 형은..


「그래.」

「..예?」


태형이는 웃음을 멈췄고, 남준형은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나는, 나는 아마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다. 윤기 형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입에 털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전개에 뻥쪄 있는 날, 처음 봤던 그 날처럼 강렬하게 쳐다보면서 확인사살을 했다.


「사귀자.」


“전화 온다.”


바닥에 던져진 태형이 폰이 쉴 새 없이 진동했다. 태형이가 액정을 흘긋 들여다보더니 알림이라며 다시 치킨에 집중했다. 아까 사진 올린 것 때문에 그런가보다. 태태의 아이폰 홈버튼에 엄지손가락을 꾸욱 대니까 잠금이 해제됐다. 얘는 아직도 내 지문을 안 지웠어?


“히이익. 너 좋아요 100개 넘었어.”


태그도 없이 사진 한 장 덩그러니 올린 게시물에 좋아요가 104개 댓글이 18개다. 이게 뭔 일이냐? 역시 현실에서 인기남은 SNS에서도 인기남이군. 좋아요 누른 사람 목록을 보아하니 죄다 여자 선배, 여자 동기, 여자 신입생.. 쯧쯔.. 너 이럼 평생 애인 못 사겨 임뫄!


“어? 뭐야. 민윤기가 좋아요 눌렀어!”


suga39님이 회원님의 사진을 좋아합니다. 인스타그램의 알림이 나를 비웃는 것 같다.


“윤기 형 인스타해?”

“아니 아이디만 있어.. 와씨! 안자면서 카톡 한 통도 없는 거봐.”


부들부들. 열이 받아서 폰을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태형이꺼라서 참았다. 김태형은 내게서 핸드폰을 넘겨받아 유일하게 소스가 묻지 않은 새끼손가락으로 윤기 형을 팔로우했다.


“형한테 시간을 좀 줘. 만날 밥만 먹던 사람한테 갑자기 햄버거 던져주면 덥석 입에 물수 있겠어?”

“내가 햄버거야?”

“아니 비유를 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그러다 평생 입에도 안대면 어떻게 해?”


왠지 형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밥도 그냥 생명유지를 위해서 먹는 사람이잖아. 굳이 햄버거를 먹으려 하겠어?


“입에 드밀면 한 입은 물어보겠지.”


태형이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막막 들이대서 겨우 한 입 베어 물었는데 퉤! 뱉어버림 어떻게 해..”


태형이가 SBS SPORTS로 채널을 바꿨다. 챔스 결승 오프닝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오오 타이밍 굿! 태형이는 진성 해축덕이다. 김태형을 따라 몇 번 보기 시작했더니 어느새 나도 레알빠가 되어버렸다.


“반대일 수도 있지.”

“엉?”

“햄버거가 완전 형 취향이라서 신세계에 눈을 뜨는 거야.”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한번 시도해 볼 가치는 있는 것 같네.”


TV에서 눈을 못 떼던 태형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내가 뭔 요상한 소릴했나? 태형이의 번지르르한 상판이 TV가 내뿜은 색깔로 오묘하게 물들었다.


“응. 나는 그랬거든.”














[형 지민이 완전 꽐라됐어요 픽업가능하세여?]-오후9:03


“야! 꽐라라고 하면 어떻게 해!”

“왜?”

“내가 진상부린 거 같잖아.”


오늘은 금요일이고 금요일 밤에는 태형이와 술 먹는 게 일상인 나는 교양레포트를 날림으로 마무리한 뒤 학교근처 치킨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길거리에서 클럽가기 전에 1차를 한다는 동기들이랑 마주쳐 주종을 소주로 변경했다. 동기들이 여자애들도 부르자면서 근처에서 자취하는 여자동기 서너명을 불렀다. 어느 새 대규모 동기모임이 된 우리는 술집 테이블을 두 개나 붙여 앉고도 모자라서 건너편에 새로운 자리를 마련했다. 우리 테이블에 공 병이 네 병쯤 생겼을 때, 불현 듯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태태. 나 취한 척 해볼까?” 개떡 같은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김태형이 윤기 형한테 카톡을 보낸 거다. 나 꽐라됐다고.


“아냐. 이게 그럴듯하고 현장감 있어. 엇. 답장 왔다.”


[나 지금 연구실. 많이 취했어?]-오후9:03


...아씨. 지금 연구실이면 뭐! 못 오겠다는 거야?


“취해서 몸을 못 가눈다고 해! 막 졸고 있다고 해!”

“그러기엔 네가 너무 멀쩡하지 않아?”

“지금 이거 반병 남은 거 원샷 할 거야.”

“아냐.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하자.”


[훅감 형 못 오시면 그냥 제가 데리고 갈까요?]-오후9:06


“그게 통하겠어? 저번에도-”


지이잉지이잉. 태형이 액정에 민윤기란 이름이 떴다. 헉! 형한테서 전화 왔다. 우리는 뜨악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태태. 어떻게 해?”

“일단 받는다?”

“받아서 뭐라고 하게.”

“너 옆에 있으면 웃음 나올 거 같아. 기다려 봐.”


태형이가 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멀찍이서 전화를 받는 태형이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웃음기가 1도 없는 대화가 길게 이어졌다. 그래도 태형이는 쩔쩔매는 기색 없이 통화를 잘 마쳤다. 나포함 웬만한 사람들은 다 윤기 형 어려워하는데 김태형 강심장은 알아줘야 한다. 태태가 스웩 넘치는 제스츄어를 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마치 자기를 추앙하라는 듯이.


“형 지금 온대.”

“헐.”

“뭔가 될 것 같은 프라이데이 나잇이지?”

“어. 그런데 나 빨리 취해야할 것 같아.”


정신이 지나치게 멀쩡했다. 반 병 남은 소주를 글라스에 꽉 채우니까 얘가 뭘 하나 지켜보던 동기들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오. 침침 달려?”

“야야. 오바야.”


말리는 김태형을 밀어내고 원샷!


“아, 오늘 따라 술이 달아! 안 취할 거 같아!”


태형이가 안주로 시킨 야끼소바 면을 돌돌 말아서 입에 쏙 넣어줬다. 안주 먹으면 더 안 취하는데.. 속이 쓰려서 그냥 씹어 삼켰다.


“나 얼굴 하나도 안 빨갛지?”

“조금 빨개.”

“진짜? 다행이다. 이모! 여기 후레시 두 병 더 주세요!”


나는 도착한 후레시를 손목 스냅을 이용해 열심히 돌리면서 결단을 내렸다. 오케이. 오늘 끝장을 보는 거야!


“너 또 마시게? 진짜 훅 간다.”

“아냐. 이 정도는 괜찮아.”

“안 돼. 그만 마셔. 나중에 올라와.”


김태형이 소주병까지 뺏어가면서 엄한 소리를 했다. 지금 윤기 형이 오고 있는데 내가 맨 정신이라니까 태형아? 나 연기 잘 못해. 알잖아. 우리는 술병을 손에 쥐고 옥신각신했다.


“야야. 윤기 형이다!”


내 어깨너머로 윤기 형을 발견한 태형이가 안면근육을 싹 굳히고 빠르게 속삭였다. 나는 들고 있던 술병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뒤를 돌아봤다. 입구 쪽에 있을 거라 예상했던 윤기 형이 바로 등 뒤에 있어서 하마터면 술병을 수직낙하 시킬 뻔 했다. 윤기 형은 딱히 표정이랄 게 없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날 내려다봤다. 본래 희노애락이 잘 나타나지 않은 얼굴이다. 내가 처음 고백했을 때를 빼고는 형의 얼굴에 이렇다 할 감정이 드러난 걸 본 적이 없다. 형의 등장에 주변 동기들이 파도를 타는 것처럼 주루룩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형은 가벼운 고개 짓으로 인사를 받아줬다.


“언제 갈 거야?”

“..지금요.”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형은 뒤돌아서 앞장섰다. 날 데리러온 거 맞아? 발걸음이 아주 거침없으시다. 급하게 소지품을 챙기고 형을 쭐래쭐래 쫓아나갔다. 형이 카운터에서 동기들 술값을 계산해주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취한 척하는 것도 잊고 형의 카드를 인터셉트할 뻔했다. 지금 여기 인원이 몇 명이며 마신 술이 몇 병이고.. 시킨 안주가.. 머리가 띵해졌다.


동기 한명이 형이 계산하는 걸 발견했는지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다. 아! 이건 내 예상에 없던 일인데!


“나머진 알아서 해라.”


넵! 안녕히 가세요! 인사성 끝내주게 밝은 동기들이 얄미웠다. 가게를 나와서 계단을 내려가던 형이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걸을 수 있어?”


여기까지 걸어 나왔는데 갑자기 못 걷는 척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멀쩡히 척척 내려갈 수도 없고! 당황해서 잠깐 허둥지둥했다. 형은 그걸 부정의 의미라고 생각했는지 내려갔던 계단을 도로 올라와 내가 서 있는 곳 바로 아래 계단에 섰다.


“내 어깨 잡아.”


나는 뾰족한 형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얇은 천 너머에 형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아 심장이 콩닥거렸다.


“언제부터 마셨길래 초저녁부터 취해.”

“아까 7시요.”


형이 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9시 32분. 그러고 보니 형 되게 빨리 왔네? 공대에서 여기까지는 꽤 먼 거린데.


형은 건물을 나와서 망설임 없이 우회전했다. 형의 발길이 닿는 곳은 안 봐도 뻔하다. 날 역에 데려다주려는 거다. 안 돼! 그럴 순 없지. 두어 걸음 앞서 가던 형은 내가 따라오는 기색이 없자 걸음을 멈췄다.


“집에 안 갈래요.”


「입에 드밀면 한 입은 물어보겠지.」근데 이렇게 들이대는 거 맞아?


“속도 안 좋고, 너무 졸린데.. 형 방에서 자면 안돼요?”

“….”


그래라고 해줘! 자고 가라고 해줘! 제발! 기대완 달리 형은 말없이 나를 쳐다만 봤다. 조사당하는 기분이다. 얘가 진짜 취했는지, 개수작 부리는 건지. 눈빛연기에는 영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푹 숙여 형의 시선을 피했다. 민망한 시간이 몇 초간 지속됐다. 난 좀 쪽팔리고 서운해졌다. 사귀는 사이에 자고가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말이야? 형 동기들은 잘만 재워 주더만! 김남준도 일주일에 몇 번씩 드나드는 형 자취방에 왜 애인은 안 데려가는 건데?


“알았어.”

“예?”


예?.. 예?.. 오예?! 승낙 받았다! 대박! 윤기 형이 내 손목을 휘어잡고 나를 박력 있게 리드했다. 심장이 콩닥대다 못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형의 자취방 위치쯤이야 눈 감고도 갈 만큼 숙지하고 있었지만 일부러 어리버리 까면서 스텝도 조금 엉켜주고 그랬다. 형은 이제 나의 연기에 완전히 넘어갔는지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면서 내 상태를 확인했다. 아, 참아야하는데 자꾸 웃음이 비집어 나왔다.


형의 자취방은 태태장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공용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른 형의 손가락을 유심히 지켜봤다. 2230*. 다 외웠어 나! 혹여나 까먹을 까봐 맘속으로 이이삼공별이이삼공별을 되 뇌이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형은 삼층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나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아, 여기는 이런 구조구나. 저 전자전거는 누구 꺼지?


“여긴데.”


구경하는 사이 301호의 현관문이 열려버렸다. 비밀번호 못 봤는데!


“옷 편한 거 줘?”

“..네.”


형의 방은 태형이 방보다는 작았지만 훨씬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아니, 정리가 잘 되어있다기보다 살림살이가 없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방 한쪽 구석에 매트리스가 덩그러니 있고, 침대와 마주한 책상에는 큰 모니터가 두 대있었다. 그리고 행거, 키보드, 서랍장. 가구라고 할 만 한 건 그 정도가 다였다. 이것저것 사들이지 못해 안달인 김태형과는 정반대다. 어디에 앉아야할지 감을 못 참아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서랍장을 뒤적이던 형이 내게 흰 무지티와 반바지를 건넸다. 잠깐 잠잠해졌던 심장이 또 요란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형이 건네준 옷에서 형 냄새가 진하게 났다.


“씻을 거야?”


떨려 죽겠어! 염소 목소리 나올까봐 대답을 못하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 것 같은데.. 제발 술 취해서 그런 걸로 봐줬으면.


“샴푸랑 린스는 바닥에 있는 거 쓰면 되고 수건은 변기 위 서랍장 안에 있어. 배고프면 저기 찬장에 햇반이랑 라면 있으니까 끓여 먹고 물은 냉장고 안에.”


형은 요목조목 자기 집 이용법을 알려줬다. 근데 가만 듣고 있으니 뭔가 이상했다. 너무 구구절절하지 않아? 무슨 휴가 전에 집 맡기는 사람 마냥..?


“난 다시 연구실 가봐야 해.”

“에?”

“연구실 가봐야 한다고. 밤새야 될 수도 있어.”


이게 무슨? 무슨 소리야? 단박에 이해가 안 돼서 에베베 거렸다. 나만 여기 혼자 남겨두고 다시 학교로 간다고? 나 취했는데? 나 형 애인이고, 오늘 처음 집에 왔는데? 여기 우리 둘 밖에 없는데?


“너 내일 3교시지?”


아, 예.. 그렇긴 한데..


“그전에 올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핸드폰 충전시켜놔. 김태형한테는 내가 말해둘게.”


진짜.. 진짜 가는 거야? 정말로? 눈에 의문을 그렁그렁달고 자신을 보는 나를 싹 다 무시한 형이 현관으로 가서 벗었던 운동화를 다시 신었다. 나는 그제 서야 형이 진짜로 나를 두고 간다는 걸 실감했다.


“쉬어.”


형은 석상처럼 굳어버린 나를 내버려두고 밖으로 나갔다. 쾅.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주저앉았다. 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아까 원샷했던 반 병의 술이 이제 막 올라오는 것처럼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너무해. 너무하잖아! 사람을 이렇게 쪽팔리게 만들기 있어? 어?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입에 들이 밀다 못해서 목구멍 깊은 곳까지 손수 들어갔는데! 토악질해서 뱉어내기 있냐고!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그렇게 별로야? 아니면…


애초에 마지못해 사귀어 준 건가? 차라리 한 번 사귀고 헤어져서 끝내자. 뭐 이런 심정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울컥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폰을 꺼냈다. 그리고 급하게 태형이한테 전화했다. 신호음이 몇 번가지 않아 태형이가 전화를 받았다. 아직 술자리인지 주변이 왁자지껄했다.


ㅡ여보세요?

“나 너네 집 가도 돼?”

ㅡ어?

“나 너네 집 가도 되냐고”


여기 있기 싫어. 내 심각한 목소리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태형이가 오라고 했다. 자신도 곧 나오겠다며.


“태형아. 형이 나 안 좋아해.”

ㅡ…데리러 갈까?

“어떻게 해?”


나만 민윤기 좋아해. 나만! 일방적으로….

@mysteryhomo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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