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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 연애담 2

“내가 진짜 쪼팔려서 말 안 하려고 했그등?”

“머가 쪼팔린데에….”

“나 사실 민융기랑 손두 못 잡아봐써.”


지짜 웃기지? 푸헬헬. 맨 정신이었으면 절대 못할 얘기들이 술술 나왔다. 아까부터 고개가 간당간당 넘어가던 태형이는 마지막 잔을 원샷하고 픽 고꾸라졌다. 돌아 본 방바닥에는 편의점 음식들과 술병이 산만하게 흩어져있다. 기절한 태형이를 가까스로 침대 위에 올려놓고 대충 빈 병만 정리했다.


“지미나. 나 물.”

“요기. 일어나서 마셔.”


생수병을 입에 대어주니 꼴깍꼴깍 잘도 삼킨다. 사실 태형이는 술이 약하다. 몇 잔만 먹어도 얼굴이 빨개지고 한 병이면 거의 치사량인데 내 기분 맞춰준답시고 두 병이나 마셨다. 태형이가 없었으면 우울증에 걸렸을 거다. 잠든 태형이 옆에 누웠다. 태형이가 몇 번 몸을 뒤척이다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태형이의 체온이 기분 좋아서 그 품으로 파고들었다. 외로운 마음을 이런 식으로 채우면 안 되는 거 잘 알지만 오래된 습관은 고치기가 힘들다. 쌕쌕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잘 자는 태태와 달리 나는 새벽까지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생각이 많아지니까 술기운도 달아났다. 한참 만에 잠에서 깬 태형이가 깨어있는 나를 보더니 인상을 썼다.


“안 잤어?”

“잠이 안 왔어.”

“윤기 형 때문에?”

“응.”


태형이가 크게 한숨을 쉬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태형이의 숨에서 술 냄새가 짙게 났다. 내 생각엔 얘 아직 술 안 깼다. 완전히 훅 간 태형이는 차라리 다루기 쉽다. 공격력이 바닥이라서 안전거리가 유지되거든. 근데 이렇게 반쯤 맛 간 김태형은 피해야 한다.


“지민아. 네 맘대로 안 풀리는 연애면.. 그리고 그것 때문에 네가 힘들면, 이제 그만해.”


생각 없이 훅훅 들어오니깐 말이다. 갑자기 재작년 겨울이 떠올랐다. 수능을 마치고 태형이네 집에서 가채점을 했었다. 나는 늘 나오던 대로 점수가 나왔고 태형이는 예상보다 점수가 훨씬 잘 나왔었다. 들뜬 얼굴로 일본여행계획을 짜는 태형이를 보다가 조금은 충동적으로 말했다.


「헤어지자.」


태형이 손에서 빙글빙글 돌 던 형광펜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태형이는 9월 모평이 끝난 날 봉투모의고사와 함께 구매한 오사카여행책에서 눈을 떼고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침묵이 흘렀다. 떨릴 줄 알았던 심장은 의외로 잠잠했다. 헤어져도 태형이랑 영영 못 보는 게 아닌 걸아니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너보다 수능 잘 봐서 그래?」


그렇게 묻는 김태형도 나랑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덜 자랐고 미숙했다. 사귀고 헤어지는 걸 감정이 아닌 상태의 변화로만 알던 시절의 얘기다.


「아니. 너 원래 나보다 잘하잖아.」

「그럼 왜?」

「그냥 우리 오래 사귀었고.. 나 다른 사람도 만나보고 싶어. 내가 좋아해서 고백도 해보고 싶고.」


영화처럼, 드라마처럼.. 그래보고 싶어. 지금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당연하고 익숙하잖아. 클라이맥스 없이. 태형이는 횡설수설하는 내 얘길 진지하게 들어줬다. 그리고 마침내 납득을 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이가 나를 따라서 지금 대학에 하향지원한 건 예상치 못한 전개지만 어쨌든 우리는 깨졌다. 와장창 부서지는 게 아니라 다시 만날 때를 대비해서 감쪽같이 붙일 수 있도록 딱 반 동강을 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그리고 내가 윤기 형을 사귀었다. 나는 윤기 형을 만나면서 짝사랑과 고백 그리고 혼자 하는 속앓이까지 연애의 정석을 차근차근 밟고 있다. 윤기 형덕에 연애가 예쁜 하트모양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김태형과 깨지지 않았으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사실이다. 형은 김태형처럼 나를 챙겨주지도, 맞춰주지도, 예뻐해 주지도 않는다. 하다못해 손도 안 잡아준다. 태형이 말대로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맘속에 슬그머니 그런 의문이 피어났다.


“나 많이 기다리지 않았어?”


숙취에 쩔어도 잘생긴 태태. 태형이랑 다시 사귀면 좋을까? 고민하면서 진한 이목구비를 대놓고 감상했다. 눈은 태형이를 보고 있는데 귓가엔 자꾸 내 고백을 승낙할 때의 윤기 형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사귀자.」.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나 복잡하고 간사하다. 이것도 태형이랑 깨지지 않았다면, 윤기 형을 사귀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사실이다.


“더 기다려야해?”

“응. 아직은 아닌 것 같아.”












골골대는 태형이를 재우고 수업에 가다가 문득 이대로 넘어가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형을 어떻게 사귀었는데! 열 번 찍으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는 심정으로 혼자 삽질한 시간이 자그마치 1년이다. 1년. 흐지부지로 만들어 버리기엔 이 관계에 투자한 내 시간, 노력, 감정, 멘탈이 너무나 아깝단 말이지. 어제완 다른 의미로 끝을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후문에 걸쳤던 발을 턴해서 윤기 형 집으로 향했다. 분기탱천한 걸음으로 윤기 형 원룸 앞까지 간 건 좋았다. 좋았는데.. 공용현관 앞에서 어제 외운 2230*을 누르다가 불현 듯 깨달았다. 나 현관문 비번은 모르는구나? 그래도 일단 들어갔다. 폰을 보니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어제 윤기 형이 내가 수업가기 전에 올수도 있다 그랬으니까 이쯤 되면 집에 있겠다 싶어 전화를 걸었다. 2층 쯤 올라갔을 때 형이 전화를 받았다.


“어디에요?”

ㅡ집인데. 넌 어디야?

“형 집 앞..”


말을 마치기도 전에 301호의 문이 번쩍 열렸다. 막 3층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던 나는 기세 좋게 펼쳐지는 문짝에 놀라서 주춤했다. 와씨! 하마터면 굴러 떨어질 뻔했네. 윤기 형이 귀에 대고 있던 폰의 통화를 끊고 날 물끄러미 쳐다봤다.


“수업 안 갔어?”

“지금 수업이 문제가 아니에요. 할 말이 있습니다.”


어리둥절해하는 윤기 형을 밀어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다다다 쏴댈 심산으로 호흡을 크게 들이쉬었는데 신발장 앞에 놓인 봉다리들을 보고 김이 빠져버렸다. 봉다리 안에는 여명과 초코에몽 그리고 숙취해소에 좋다는 각종 편의점 음식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포장된 순댓국도 있었다. 형은 술을 마신 기색이 없으니 저건 날 위해 사온 게 분명하다. 난 본래 쉬운 남자라 그 봉다리들만 보고도 서러운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았다. 그래도 완전히 무신경 한 건 아닌가봐. 내가 조금은 신경 쓰이나봐!


“수업이 문제가 아니면 뭐가 문젠데.”


형이 현관문을 닫으면서 여상히 물었다.


“계속 서 있을 거야?”

“아, 아뇨.”

“저기 대충 앉아.”


형이 가리킨 곳은 침대 위였다. 어제 내가 뛰쳐나갈 때 상태 그대로 요가 정갈히 정리되어있는 침대. 형은 나를 앉혀두고 내 발치에 편의점봉투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쭈그려 앉아서 사온 것들을 바닥에 일렬로 정렬하기 시작했다. 난 너갱이가 빠진 채 형의 정수리만 내려다보다가 형이 고개를 들었을 때라야 정신을 차렸다.


“언제 왔어요?”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뭐가 문제냐고.”

“무, 문제는..”


‘형 돌하르방이랑 사귀어도 이것보단 행복할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별로예요?’, ‘귀찮아서 사귀어 준거죠?’, ‘계속 이렇게 굴 거면 헤어져요.’ 등.. 준비했던 말들이 많은데 하나같이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질 않았다.


“11시쯤 왔어.”


퍽. 나도 모르게 주먹으로 형의 어깨를 쳤다. 불시에 공격을 당한 형은 뒤로 넘어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형이 어처구니가 없단 표정을 지었다.


“미쳤어?”

“왔으면 전화해야죠!”

“술 깨서 집 간 줄 알았지.”

“일찍 올 거면서 왜 담날 올 것처럼 말했어요?”

“원래는 밤새는 거였어.”


담담하게도 말한다. 내가 지 때문에 어제 머릿속으로 소설 수십 편 휘갈긴 거 하나도 모르고!


“집 간 거 아니었어?”


형이 어제랑 똑같은 꼬라지인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물었다. 아차 싶었다.


“가, 갔다가 잠만 자고 나왔어요.”


왠지 태형이네 집에서 잤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내 본능이 거짓말을 하라 시켰다.


“수업가려고?”

“네..”

“근데 왜 여기 있어?”

“..휴강”


형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못 믿는 거 같다. 나라도 그럴 거다.


“아, 몰라요. 몰라. 저 순댓국 끓여줘요.”


형이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저 때문에 사온 거 맞죠? 저 해장하라고 사온 거죠? 캐물으니까 자기 먹으려고 사온 거란다. 아닌 거 다 아는데. 형이 순댓국봉투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전자렌지에 데워도 될 걸 굳이 냄비를 꺼내서 쏟아 넣는다. 상 펴고 수저랑 물 좀 놓으라는 형의 말에 넵! 하고 일어섰다. 형의 조촐한 살림살이를 뒤져서 세팅을 마치자 형이 상에 냄비를 내려놨다.


“형.”

“왜?”

“저 부탁이 있어요.”

“뭔데.”

“손 잡아줘요.”


막 숟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던 형이 기침을 했다. 사레가 심하게 들렸는지 마른 몸이 위아래로 크게 들썩였다.


“그렇게 놀랄 부탁인가요?”

“소, 손?”


형의 얼굴이 기침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거 때문인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맹세코 민윤기 이 정도로 당황한 거 내가 고백했을 때 빼고 처음 본다.


“밥 먹는 동안 잡아줘요.”

“어, 어떻게 잡아.”

“왜 못 잡아요! 왜왜!”


형은 내 성질머리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몰라, 몰라! 이제 나도 몰라! 나 막 나갈 거야! 형의 눈앞에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형이 정신사납다고 한소리 했다.


“잡아줘요! 사귀는 사이잖아!”

“알았으니까 가만히 좀 있어봐!”


형의 알았다는 소리에 지랄발광난리부르스추던 손을 조신하게 만들었다. 형이 한숨을 후- 크게 쉬었다. 형의 손이 천천히 다가왔다. 이게 뭐라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꼴깍 넘기는 침소리가 너무 커서 형 귀에까지 들렸을까봐 걱정이 됐다. 하얗고 섬세한 손가락이 내 작고 짧은 손가락을 휘감았다. 되게 부드러운데, 힘있고.. 따듯했다. 엉킨 두 손을 감격스러운 얼굴로 오래 응시했다.


“됐지?”


끄덕끄덕.


“밥 다 먹을 때까지 놓지 마요.”

“..나 오른손잡이인데.”

“안 돼. 안 돼. 그래도 안 돼.”


결국 형은 내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한 숟가락도 먹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내게 맞춰주는 형이 좋다. 남은 왼손으로 턱을 괴고 내가 먹는 걸 지켜보는 형은 더 좋다. 12시간 동안 날 지옥에 수십 번 담금질 하고 딱 한번 천국을 보여주는 형이라도 너무 좋다.


“맛있냐?”

“제가 이때껏 먹은 순댓국 중에 최고예요. 따봉. 따봉.”

“참나.”

“이게 약간 무슨 맛이냐면요..”

“?”

“사랑의 맛?”


형이 푸스스 웃었다. 앞으로 1년 동안 형을 더 짝사랑해야 된대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은 얼굴로.

















“나 형이랑 뭐했는지 궁금하지? 궁금하지?”

“하나도 안 궁금한데.”


태형이가 타로스무디를 쪽쪽 빨면서 부정했다.


“아닌데, 아닌데!? 궁금할 텐데!?”

“전혀.”


다른 때는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뭔 일 있냐고 자기한테 다 털어놓아보라고 하면서 오늘따라 유독 냉하다. 내가 너한테 직접 말하려고 어제 오늘 얼마나 참았는데!


“에잇! 그냥 말할래! 내가 어제 수업에 가려다가 말고 형네 집으로 갔거든? 뭔가 이렇게 넘어가면 안 되겠다 싶은 거야. 그래서 형네 집에 갔지. 근데 내가 대문 비번은 외웠는데 현관문 비번을 몰라서 형한테 전화를 걸었어. 원래 형이 11시 쯤 집으로 온다고 했었거든. 형이 전화를 받아가지고 내가 어디냐고 물었단 말이야? 형이 집이라고 하는 겨! 넌 어디냐고 묻는 겨! 그래서 내가 집 앞.. 이라고 하자마자 문이 번쩍 열리면서 형이-”

“요점만 말해줄래?”

“나 형이랑 손잡았어.”


풉. 김태형이 비웃었다. 엄청 티나게.


“되게 되게 오래 잡았어! 30분 동안!”


풉. 또 비웃었다. 저건 일부러 그런 거다.


“야. 장족의 발전이거든?”

“둘 다 무슨 중딩이야?”


태태가 빈정거리는 거 8년 만에 처음 본다.


“아니다. 중딩도 아니다. 너 중 2 때 나랑 키스했잖아.”

“미, 미쳤어?”


나는 김태형의 입을 틀어막으면서 주변을 살펴봤다. 수업 시작시간보다 20분 일찍 와서 인지 천만다행으로 강의실에는 김태형이랑 나밖에 없었다.


“죽는다고 할 땐 언제고.”


태형이가 빈 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면서 불퉁하게 말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내가 변덕을 부리는 게 마음에 안 드나보다.


“원래 연애가 롤러코스터라이드인 거 아니겠어?”


그러거나 말거나 행복감에 젖어 어제 형이랑 주고받은 카톡을 복습하는 나를 태태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좋아? 그런 게?”

“엉엉엉.”

“진짜 롤러코스터는 타지도 못하는 주제에.”


자꾸 구박하는 김태형이 미워서 태태의 손을 왕 물었다. 장난으로 문 거긴 해도 꽤 아플 텐데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만 보는 눈빛이 진지하다. 맨 정신에 왜 이러실까? 겸연쩍어진 나는 물었던 손을 뱉어냈다. 태형이가 손등에 묻은 침을 자기 옷에 슥슥 닦았다.


“그런 게 좋으면 그렇다고 말하지.”

“….”

“나는 네가 싫어할까봐 안전운행만 했잖아. 시속 60km이하, 과속방지턱, 신호 딱딱 지켜가면서.”


분위기가 왜 이렇게 됐지? 태형이와 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요즘 자주 이런다. 윤기 형이랑 사귀기 전에는 적극적으로 나의 짝사랑을 지지해주던 태형이가 조금 변한 것 같다. 김태형은 내게서 시선을 떼고 인쇄해 온 프린트물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교양수업이라 볼 것도 없을 텐데 집중하는 척한다. 무안해진 나는 태태 옆에서 괜히 폰을 만지작거렸다. 몇 분이 지나자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다. [결혼과 가족]이라는 이 교양수업은 첫 주에 정해진 조별로 자리를 앉는다. 태형이랑 내가 다른 조에 속해 있다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몹시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태형이한테 “쫌따 봐.”라고 한 뒤 지정된 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태형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결혼과 가족]은 우리 학교 최고 인기 교양이다. 수강신청이 0.1초 만에 마감되고 수강신청 못한 사람들 사이에선 암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전설의 강의. 원래도 연애수업으로 유명한 강의인데 대학내일 두근두근 캠퍼스 코너에 소개되고 나서는 애인 만들기에 혈안이 된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기 시작했다. 우리는 워낙 다들 결가결가(결혼과 가족) 거리니깐 호기심이 발동해 시간표에 넣었었다. 태태가 그 어렵다는 수강신청을 한 번에 성공한 건 예상치 못한 일이다. 태태는 자타공인 똥손으로 전공 시간표도 말아먹기 일쑤인데 말이다. 태태와 달리 수강신청에 실패한 나는 수강정정기간 내내 대기를 타다가 겨우 자리를 얻어 출석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박지민.”

“네.”

“윤효정”

“네.”

“이정원.”

“네.”


하지만 아무리 연애수업이라도 남녀 티오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보니까 몇몇 클래스에서는 남초, 여초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우리 클래스가 그랬다.


“전정국.”

“네.”


정국이가 뒷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대답했다. 타이밍 한 번 대박이다. 전 수업이 교양학관이랑 제일 먼 예술대라더니 정국이는 맨날 저렇게 아슬아슬하게 출석을 한다.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거친 숨을 가다듬는 정국이. 녀석.. 오늘도 잘생겼네. 내 얼굴도 아닌데 볼 때마다 내가 다 뿌듯해.


우리 조는 나랑 정국이 외 남자 3명 그리고 여자 3명으로 이뤄져있다. 우리 맘대로 짠 건 아니고 첫 수업 때 교수가 되게 긴 설문지랑 MBTI 그리고 연애유형검사지를 가져와서 작성하게 했는데 산출된 결과에 따라 성향이 가장 비슷한 사람들 끼리 묶은 거란다. 유사할수록 연애할 확률이 높다나? 난 좀 시큰둥했다. 반대가 끌리는 법도 있는 거잖아? 어쨌든 그렇게 한 조로 묶다보니 우리 조는 남초가 됐다. 우리 조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의 조가 남초이고 유일하게 태형이가 속한 조만 여자가 5명 남자가 3명이다. 태태는 원래 주목받으려고 태어난 놈이다. 운명이 그래. 그리고 두 번째 수업 때 교수가 각 조의 유형과 유형끼리의 매칭률을 설명해줬었다. 솔직히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난다. 다만 교수가 이 클라스에서 매칭률 98%에 육박하는 쏘울메이트가 나왔다고 하면서…


“형. 저희 만원데이트 뭐할지 생각해봤어요? 전 흔한 건 하기 싫어서 좀 찾아보니까 가평까지 지하철 타고 가서 남이섬보고와도 괜찮을 것 같더라구요.”


나랑 정국이를 호명했던 건 잊을 수가 없다. 총 6개의 클래스를 통 털어 1위라고 박수까지 받았으니까. 어쨌든 정국이랑은 그때 통성명을 했다. 한 조가 되면서 같은 조인 남자애들이 매칭률을 들먹이며 우격다짐으로 정국이랑 나를 커플로 맺어줬다. 여자애들은 정국이가 많이 아쉬웠는지 그런 게 어딨냐며 항의했지만 결국에 우리는 짝이 되었다. 아, 참고로 말하면 태형이와 나의 매칭률은 3%다. 태형이는 순 사기라며 납득을 하지 못했다.


“오! 좋다. 근데 시간 괜찮아? 가평 갔다 오려면 하루 종일이니까 주말에 가야하잖아.”

“전 이번 주 토요일 괜찮아요. 형은요?”

“나도 뭐 딱히 일정은 없어.”

“오케이. 이번 주말 가평.”


중간고사가 끝나고 교수가 만원데이트라는 과제를 내줬다. 짝인 사람끼리 만원으로 데이트를 하고 소감을 레포트로 써서 제출하는 과제다. 듣기에는 장난 같은데 성적 반영률이 중간기말보다 높다보니깐 가라로 할 순 없게 생겼다. 내 보기엔 레포트는 허울이고 만원가지고 꽁냥꽁냥 해보라는 거 같지만.. 아무튼 확실한 건 지금 이 교실에 진짜 만원만 가지고 데이트하려는 사람은 정국이랑 나밖에 없다는 거다.


“형. 이거 이후에 수업 없죠? 같이 저녁 먹으면서 계획 좀 세워요.”

“그럴까?”


정국이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 정말 지독하게 잘생겼다. 단지 짝이란 이유로 수업 내내 정국이를 독점하고 있는 게 미안할 정도로 잘생겼어. 연극영화과인 정국이는 분명 대스타가 될 거다. 마스크가 끝내주니까 말이다. 훗날을 대비해 특별한 인맥하나 만들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정국이한테 잘해줘야겠다고 또 다짐하는 나다.


“연애가 순탄하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연애 당사자 간 사이가 좋아야 하고 갈등도 잘 풀어야 하지만 실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죠.”


교수가 포인터를 눌러서 화면을 띄웠다. 파워포인트에는 대제목으로 chapter 9. 바람 이라고 적혀있었다.


“바로 연인 외의 사람에게 한 눈을 팔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인이 있는 데도 의식, 무의식적으로 타인에게 끌리곤 합니다. 상대는 다양해요. 오랫동안 알아왔던 사람이기도하고”


나보다 앞쪽에 앉은 태형이가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내 눈이 태형이의 뒤통수에 머물러 있던 탓에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엉키는 시선이 겸연쩍어 먼저 얼굴을 돌렸다.


“처음 보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이번엔 반대쪽에 있던 정국이와 눈이 마주쳤다. 정국이가 그린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왜요?”라고 물었다. 난 아무 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분이 묘했다.


“오늘은 유혹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봅시다.”

@mysteryhomo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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