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1

나의 피투성이 연애사


Mickey Avalon - Electric Gigolo







한참을 하하호호 웃고 떠든 분위기 좋은 모임이었다. 여우짓 분야에서 대한민국 둘째가라면 서러울 미영이 남친을 보여준다 했을 때, 솔직히 얘가 왜 안하던 짓을 하나 싶었다. 어차피 3개월도 못 가고 헤어질 놈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미영은 수화기 너머에서 불을 뿜으면서 이번엔 다르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헌데, 실제로 만나보니 정말로 그랬다. 남자 앞에서 늘 자신을 꾸며내느라 전전긍긍했던 미영이 아니었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워보였다. 지민은 미영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에 확신을 주듯 미영이 청첩장을 내밀었다. 지민은 너무 놀라서 건네어진 청첩장을 반 동강 낼 뻔 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결혼이야? 겁도 없는 기집애! 미영은 복잡한 절차 생략하고 스몰웨딩으로 최대한 빠르게 날짜를 잡았다고 부연 설명했다. 이유는 역시 그거였다. 속도위반. 처음에는 뇌가 다 얼얼했지만 어찌됐던 자신만큼 방황하던 미영이 임신으로나마 마음을 잡고 한 남자를 진득하게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니 축하해줘야 하나 싶었다. 지민은 청첩장에 찍힌 친우의 이름과 낯선 남자의 이름을 보면서 한껏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이어져 나온 미영의 말은 지민의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고도 남아 지민의 멘탈을 지구 밖으로 날려버리는 초특급 발언이었다.


“지민아. 근데…”

“어.”

“태형이도 와. 그건 알지?”


이런 씨발. 알긴 뭘 알아.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1

나의 피투성이 연애사











지민은 불현 듯 며칠 전 자신의 폰에 떴던 페이스북 알림을 떠올렸다.


[박지민님, 이유나님을 아시나요?]


그리고 그 문구를 보자마자 폰을 던져 액정이 박살났던 일도.


「씨발년. 이쁘네.」


그리고 그 박살난 핸드폰을 주워 와서 이유나의 페이스북을 염탐했던 찌질한 기억까지 모조리 다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불길한 징조가 아니었을까 싶다.


“저 그냥 선릉역이나 삼성역에서 내려주세요. 어디가 더 가깝지?”

“아니에요. 댁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역 까지만 데려다 주셔도 되는데.. 지하철 타면 금방이에요. 십분도 안 걸려.”

“금방이니까 데려다 드릴게요. 혹시 약속 있으세요?”

“아니, 그건 아니고.. 알겠습니다.”


미영의 예비신랑 전정국은 놀랍게도 연하였다. 것도 두 살 연하. 연하라면 치를 떠는 미영이 어찌된 연유로 정국과 사고를 쳐서 인륜지대사라고하는 결혼을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진행하게 되었는지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납득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말 편하게 하세요.”

“저는 이게 편해요.”


정국이 넉살 좋게 웃었다. 방금 지민은 이 좁아터진 차량을 배경으로 벚꽃 잎이 날리는 CG가 덧씌워지는 환각을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존나게 잘생겼거든. 잘생긴 것과 더불어 대학을 졸업한 그 해에 임고를 패쓰해서 저 애기같은 얼굴로 벌써 교편을 잡고 있단다. 남들은 스물다섯 살에 교생을 나가는 이도 있는 마당에 말이다. 사회극극극극초년생이라 아직 모아둔 돈은 없을 테지만 미영이 넉넉하니 그건 되었고.. 선생님이면 크게 탈선하는 일없이 따박따박 돈 갖다 바칠 테고, 얼굴 잘생겼고, 어리고, 언뜻 보니 몸도 좋은 것 같고, 시댁은 부산이라고 들었고.. 씨바 김미영 여러모로 존나 땡잡았다. 지민은 부러워서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실제로도 아까부터 속이 더부룩하고 자꾸만 머리가 아찔아찔했다. 이건 미영이 부러워서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들은 ‘김태형’ 이름 석 자 때문이었지. 김태형은 이름 석 자만으로 지민에게 소화불량과 우울증을 동시에 안겨다 줄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이쪽으로 빠지면 안 되는!”

“아. 죄송해요.”


이미 빠졌다. 정국의 운전 실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길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논현에서 5년 동안 자취했다면서 왜 이 길로 가? 정국은 신사를 빙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거리가 나왔다. 지민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클럽들이 즐비한 거리였다. 이른 오후라 클럽들은 본래의 제 모습을 숨기고 아무도 찾지 않아 폐점된 골동품가게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지민은 몇 시간만 지나면 저 초라한 입구에 불이 번쩍 들어오고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 것을 알고 있었다.


“요즘도 주말에 클럽 자주 가세요?”

“예?”


이게 무슨 말이냐? 불쾌함과 의아함을 반쯤 섞은 표정으로 정국을 쳐다보자 전방을 향하고 있던 정국이 눈짓으로 힐끔 지민을 쳐다봤다.


“저번에 한번 마주친 적 있잖아요. 우리.”


있기는 했다. 신사역이 아닌 강남역에서. 9번 출구 스무디킹에서 함께 클럽에 갈 친구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창밖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미영이었다.


미영은 지민과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 된 것을 계기로 지난 10년간 막역지우의 연을 맺고 있는 중이다. 미영은 작년에 그렇게 바라고 마지않던 스튜어디스가 되었다. 스튜어디스가 되기 위해 미영이 한 짓들을 서술하면 팔만대장경의 분량이 모자랄 정도다. 미영은 지역사회에서 먹어주던 예쁘장한 얼굴하나 믿고 그 직업에 덤볐다가 3년 동안 1차 면접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했으며 그 3년간 자신보다 예쁜 아이들은 쌔고 쌨다는 잔인한 사실을 매시간 매분 매초 통감해야만 했다. 미영의 자존감은 낮아질 대로 낮아졌다. 미영은 낮아진 자존감을 잘못된 방식으로 높이려했다. 바로 닥치는 대로 남자를 만나는 것. 아침에는 승무원 학원, 저녁에는 서울의 온갖 클럽들을 전전하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리고 미영의 밤생활 1년차에 지민이 합류했다. 김태형과 헤어진 지 1개월, 김태형에게 박지민이 아닌 새로운 애인이 생긴지 2주차 되던 때의 일이었다. 둘은 죽이 잘 맞았다. 원래도 잘 맞던 죽이 놀 때는 아주 30년간이 산 부부마냥 척척 맞아 떨어졌다. 미영과 지민은 최고의 콤비였다. 서로 마음에 드는 녀석이 있으면 팍팍 밀어줬다. 거짓말할 땐 둘 다 청산유수가 따로 없었다. 취해서 뭔 헛소리를 지껄여도 신들린 듯 다 받아 쳐주는 서로를 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소울메이트임을 확신했다. 지민이 게이이고 미영이 이성애자인 건 놀 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흥만 오르면 지민은 여자와도 키스했고 미영 역시 여자와 갈 데까지 간 전적이 있다. 그렇게 3년을 망나니처럼 살았다.


미영은 칠전팔기 끝에 국내대형항공사에 취직하고 난 후, 클럽에 발을 끊었다. 초반에는 바빠서 그런 것이겠거니 했다. 미영의 항공사는 일정기간동안 인턴으로 일하고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입사 초반 몇 개월은 매일매일이 면접이나 다름없다고 들었다. 그래서 자주 못 노는 것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미영은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나서도 뜸하게 얼굴을 비쳤다. 지민의 생일 혹은 빠질 수 없는 이벤트에만 느즈막히 참석해 그마저도 일찍 갔다. 예전처럼 동틀 때 클럽에서 나와 함께 순대국과 쏘주 각 1병으로 해장하고 헤어지는 경우는 절대 없었다. 지민은 미영이 정신을 차린 건가 싶었다. 그리고 그런 미영을 보면서 지민 자신도 멀쩡한 와꾸로 태어나 멀쩡한 대학 나와서 멀쩡한 직장에 다니고 있는데 왜 혼자만 아직도 이렇게 사나.. 격한 현타를 맞았었다. 아주 잠깐 동안. 그렇다. 지민은 미영 외에도 클럽에서 사귄 친구가 열두다스가 넘었던 것이다. 지민이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그들이 그 꼴을 가만두지 않았다. 지민은 미영 없이도 신나게 놀았다.


근데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미영을 발견한 것이었다. 지민은 대번에 스무디킹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오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김미영?」

「어? 지민아!」


미영은 지민을 반가워했다. 남자는 미영의 옆으로 바짝 붙어 섰다. 남자친구 인가보지? 검은 볼캡으로 얼굴을 반쯤가리고 있어 이목구비가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 와중에도 높이 솟은 코가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다는 건 알 수가 있었다. 키도 말쑥하니 컸고 스타일링도 깔끔했다. 앤써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대가리 짝고 키 큰 모델 스탈. 김미영 취향 어디 안 가는 군.


「여기 내 남자친구.」


알아. 이것아. 지민은 남자친구에게 목례를 했다. 그 쪽도 어색하게 인사를 해왔다. 길거리에 서서 이러는 것도 모양 빠지고 둘은 데이트를 한다고 그래서 얼른 가라고 보내줬다. 미영이 지민에게 연락을 하겠다고 그랬다. 빈 말인 줄 알았다. 최근 반년 간 미영은 지민에게 먼저 연락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진짜로 연락이 왔다. 남자친구를 보여주겠다고. 그 결과가 바로 현재이다. 지민은 차를 두고 나온 걸 후회했다. 코엑스에서 밥을 먹자기에 지하철로 다섯 정거장인데 차를 가져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헌데 밥만 먹는 게 아니었다. 김미영 앙큼한 것이 청첩장을 내밀었다. 더하여 이미 신혼집 계약을 마쳤다며 삼성동에 얻은 그들의 보금자리까지 다녀온 참이었다. 멘탈이 탈탈 털린 하루다.


“그건 강남역 아니었나요?”


지민의 되물음에 정국은 대답 없이 픽- 웃고 말았다. 지민의 기분이 폭락하는 주가처럼 고꾸라졌다. 김미영 이게 뭔 말을 지껄인 거야? 아니면 혹시 설마…


“저 본 적 있어요?”

“뭐.. 가끔?”


지민은 어디서 봤냐고 묻기가 무서워졌다. 그래서 입을 조가비처럼 다물었다. 때로는 묻지 않는 게 이득인 질문들이 있다. 지민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정국은 긴장한 지민을 놀리듯이 카오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랩을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산이와 매드클라운의 못 먹는감. 마침 신호에 걸렸다.


“야 니 콧대가 차로 치면 삼각별이라며”

“….”

“반도 전체가 네 양식장 바다가 삼면이라며”


왜 날 보면서 그러는데?


정국의 차가 지민의 원룸 앞에 섰다. 지민은 차에서 튕겨져 나오듯이 내렸다. 그리고 정국에게 빠르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결혼식 때까진 절대로 보지말자! 지민이 뒤돌아 원룸을 향해 내달렸다. 지민은 원룸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ㅡ여보세요?

“너 걔 어디서 만났어?!”

ㅡ응? 무슨 말이야?

“니 예랑이! 날 몇 번 봤다잖아! 나보고 요즘도 주말에 클럽 자주 가냐고 묻잖아!”

ㅡ아.. 그거..


미영이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지민은 용의자에게서 구린 냄새를 형사마냥 미영을 몰아붙였다.


“너 사실대로 말해. 설마 클럽에서 만난 애랑 사고 친 거냐?”

ㅡ아니야!

“진짜로?”

ㅡ..클럽은 아니야.

“씨발. 그럼 어딘데?”

ㅡ왜 욕을 하고 그래! 나 임산부야!

“지금 그게 문제냐!? 빨리 말 안 해? 저 새끼 죽돌이지? 맞지?”

ㅡ아니라니까!

“그럼 날 어떻게 아는데!”

ㅡ몇 번 봤대!

“그게 죽돌이 아님 뭐야?

ㅡ네가 죽돌이지. 어쩌다 한 번 가. 걔는..


김미영이 진짜 뇌가 어떻게 됐나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쉴드를 치는 거 보면. 지민은 해주고 싶은 욕이 한 됫박이었으나 미영 말대로 미영은 임산부였다. 게다가 둘은 현재 한 집에서 같이 살고 잇는 예비신혼부부였다. 어떤 말로 미영을 설득해야할지 고민했다.


ㅡ코팡안에서 만났어.. 풀문파티.

“씨발.”


지민은 미영의 인스타에서 코팡안 게시물을 찾아냈다. 불과 두 달 전이다.


“너 진짜 대책이 없다. 얘 뭘 믿고 결혼하냐? 아무리 애가 생겼어도 그렇지.”

ㅡ넌 여자가 아니라 몰라. 아, 일일이 설명하기 지쳐.

“너 지금 일일이 설명해야해. 부모님한테는 뭐라 했냐? 구라 쳤지?”


미영은 말이 없었다. 지민은 대충 짐작이 갔다. 정국은 겉으로 볼 때는 꽤 괜찮은 조건의 남자였다. 껍질 훌륭하고, 집안 괜찮고, 직업은 부모님세대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할 선생님.. 미영이 뭐라 입을 털어댔을지 딱 감이 왔다.


“야. 이건 아닌 거 같아.”

ㅡ이미 결정된 일인데 꼭 그렇게 악담을 해야겠어?!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지! 그럼 맞다고 하냐!”

ㅡ괜찮은 애야! 너보다 정신 똑바로 박혀있어!

“야!”

ㅡ끊는다.


미영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지민은 열불이 나서 냉수부터 찾았다. 같이 놀 땐 언제고 나보고 정신이 똑바로 박혔느니, 마느니 할 자격이 있냐? 너? 씨발, 잘 됐다. 이 핑계로 결혼식이나 가지말지 뭐. 김태형 안 마주치고 좋네. 지민은 폰과 함께 자신의 몸뚱이를 침대 위로 집어던졌다.


김태형은 1학년 3반의 전학생이었다. 특이하게 입학식 다음 날인 3월 3일에 거창에서 전학 온 전학생. 지민은 태형이 교실로 들어오던 순간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교실에 남은 책걸상이 없어 복도에 쌓여있는 책걸상을 머리에 이고 들어왔었다.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그랬을 거다. 태형은 없는 친절도 끌어내게 할 만큼 미남이니까. 태형은 곧 전교생의 아이돌이 되었다. 다가가기 힘들 정도로 잘생겼는데 성격은 소탈했고, 매일 떠들고 장난치는데 공부를 곧 잘했다. 모순이 더 큰 매력이 되는 인물이었다. 요즘 말로 반전매력이라고 해야 하나? 태형이 농구장에서 공이라도 튕길라치면 여자아이들이 전부 몰려가 태형을 구경했다. 반 여자애들 대부분이 몰래 혹은 대놓고 태형을 좋아했다. 미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너무 모두의 아이돌이라 아무도 선뜻 고백을 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아슬아슬 1학년이 끝날 무렵 태형과 주희가 사귄다는 소문이 돌았다. 것도 태형의 고백을 주희가 받아주었다는 소문. 남주희는 여자 김태형급의 인물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놀 땐 확실히 노는 태형과 달리 주희는 착실한 모범생이었다는 것이다. 주희는 전교에서 제일 예뻤고, 공부도 제일 잘했으며, 엄마는 우리학교 수학선생님이었다.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 생각했다. 미영이 주희 그 여우같은 년을 죽여 버리고 싶다면서 울고불고 난리를 칠 때 옆에서 달래준 것은 지민이었다. 확실히 주희가 여우긴 했다. 김태형은 의외로 맹추였고.


지민은 태형이 주희를 좋아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는 아이들 중 한명이었다. 그건 태형과 친해서가 아니었다. 지민이 눈치가 빨라서였다. 사실 고1 시절 태형과 지민은 말 몇 마디 섞지 않는 사이였다. 노는 그룹이 달랐다. 열일곱 지민은 덩치가 아주 작았고 덩치만큼 마음도 왜소했다. 태형이 어울리는 ‘노는 무리’에 낄 수 있는 스펙이 안 되었다는 말이다. 태형은 모두에게 잘 해주긴 했지만 모두와 친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지민은 태형의 감정을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체육대회 날, 1학년 3반은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부상은 스프링 노트였다. 아이들은 엇비슷한 표지의 스프링 노트를 취향대로 골라 가지겠다며 아우성이었다. 지민은 어쩌다가 신데렐라가 그려진 스프링 노트를 받아들었다. 뒤쪽에서 주희가 자신도 신데렐라가 갖고 싶다며 바꿔달라고 하소연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민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뒷자리 영우에게 하는 말이었다. 영우는 주희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줘서 한껏 신이나 버렸다. 그래서 일부러 주희를 놀리며 노트를 바꿔주지 않겠다고 했다. 열일곱이니까 그럴 수 있었다. 주희는 잔뜩 심통이 났다. 지민은 자신에게 필요 없는 신데렐라를 바꿔줄까 잠시 생각했다가 자기에게 바꿔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먼저 나서는 건 깝치는 거다 싶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근데 그때 태형이 지민에게 다가왔다.


「박지민. 그거 나랑 바꿀래?」


태형이 들고 있는 것은 네이비색 깔끔한 노트였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경쟁이 심하던 것.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맙다했다. 태형은 지민의 신데렐라 노트를 받아들고 주희에게 갔다. 주희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태형의 신데렐라 노트와 자신의 노트를 교환하는 게 보였다. 지민은 그 때 눈치 챘다. 태형이 주희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태형과 주희는 브란젤리나 버금가는 전교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가십의 중심이었고 모두의 관심대상이었다. 참 예쁘게도 사귀었다. 둘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나 [말할 수 없는 비밀]같은 영화와 닮아있었다. 둘이 지나가면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인 볼품없는 고등학교도 어느새 청춘영화에 등장하는 배경으로 탈바꿈해있었다. 영화 찍고 앉아있네. 미영은 둘만 보면 그렇게 비아냥거렸다. 지민도 동감했다. 그들은 영화를 찍고 있었다. 인생에 한 번뿐인 학창시절을 가장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는 씬을. 그런 둘이 헤어진 건 수능이 끝난 직후의 일이다. 지민과 태형이 사귄 건 그보다 더 후의 일이고.












잘지내?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잘 지내냐고 묻냐? 지민은 바로 친구차단을 눌렀다. 이렇게 차단시킨 사람이 백 단위를 넘어갔다.


“그만 놀아야지..”

“뭘 그만 놀아요?”


지민은 화들짝 놀라 의자째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런 지민의 의자를 단단하게 참아준 것은 민대리였다. 지난 달 창업을 하겠다며 돌연 회사를 관둔 윤대리의 빈자리를 채운 경력직. 오늘 오전 반차라 했잖아. 12시 30분도 안 되었는데 왜 벌써온 거야?! 지민은 벌렁벌렁 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지민은 모두와 잘 어울리는 편이었으나 민대리는 불편했다. 아니 불편해졌다.


“점심 안 드세요?”

“아, 예.. 다이어트해야해서.”

“지민씨가요?”

“네에..”


지민은 민대리와의 첫 회식에서 인사불성이 되어 기절 한 후, 알몸으로 한 모텔에서 깼다. 직장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가진 지민에게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더 최악은 기억마저 날아갔다는 거다. 모텔 바닥에 들러붙은 콘돔과 온 몸에 살벌하게 새겨져 있던 키스마크가 아니었다면 분명 현실도피를 했을 거다. 지민은 그날 먼저 모텔을 나왔다. 다음 날이 토요일이라 다행이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튀는 내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하나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다. 미영에게 전화도 걸었었다. 미영은 아예 철판을 깔아버리라는 책임감 없는 조언을 했다. 별 수가 없었던 지민은 미영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민대리 역시 그 날 일에 대해 일언반구가 없는 걸로 봐선 그도 아마 자신과 같은 심정이 아닐-


“말랐잖아. 오히려 좀 쪄야겠던데?”

“….”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다. 가끔씩 요상한 방향으로 튀는 대화가 부담스러웠다.


“저 스벅 갈 건데 뭐 사다드릴까요?”

“아니. 난 됐어요.”


지민은 자리를 피할 요량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 이후 이주동안 내내 이런 식이었다.


“지민씨.”


민대리가 막 사무실을 나서려는 지민을 불렀다.


“젊을 때 많이 놀아요.”

“..예?”

“놀대로 놀아 봐. 이놈저놈 만나다 보면 그놈이 그놈이란 생각 들 거야.”


씨발. 뭘 안다고. 그놈이 그놈이란 생각은 2년 전부터 하고 있다. 지민은 대꾸 없이 사무실을 나왔다. 봄이 오려나? 날씨가 좆같이 좋았다.


그 시절 자존감이 바닥을 친 건 미영뿐만이 아니었다. 지민 역시 태형과 헤어진 이후 맛이 훅 가버렸다. 그러던 중에 미영에 손에 이끌려 클럽이란 곳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그곳 사람들은 다 지민을 좋아했다. 너도나도 지민의 번호를 원했으며 맘만 맞으면 원나잇도 가능했다. 물론 다음 날 연락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그 날 밤만은 지민과 사랑에 빠진 듯 굴었다. 지민은 밤생활에 중독되었다. 처음에는 애인도 만들고 그랬던 것 같다. 헌데 애인을 만들면 뭐하나? 공허함이 가시지 않았다. 놀다가 만난 앤데, 뭐. 라는 생각이 지민을 지배했다. 애인에게 성실했을 리 만무하다. 애인이 있어도 계속 놀러 다녔다. 처음에는 공들여서 했던 거짓말도 귀찮아져 이유 없이 잠수 타고 상대방이 화를 내면 그 핑계로 연락 끊는 경우가 잦아졌다. 미영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자신과 미영은 천하에 쌍년쌍놈이었다. 둘이 다니면 쌍쌍바 소리를 그렇게 많이 들었다. 보통의 인간들은 지민과 미영을 씹고 끝났지만 개 중에는 진심인 이도 있었다. 솔직히 약간의 죄책감은 가지고 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자각과 함께.


근데! 도저히! 못 고치겠는 거다!


누구를 만나도 김태형과 사귀었던 시절만큼의 감정이 끓어오르지 않았다. 그 순수하고, 없으면 죽을 것 같고, 뭐든 다 해주고 싶고, 자신보다 상대방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감정. 지민은 그 감정을 다시 퍼부어 보고 싶었다. 김태형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맘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김태형과 헤어진 지 3년이 흘렀는데도 말이다. 김태형은 지민이 수많은 남자를 갈아치우며 방황하던 3년 동안 한 번도 여자친구를 바꾸지 않고 아주 건전한 연애를 했다. 그것조차 열이 받았다. 작년에 한국감정원에 입사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미영이 지민한테 넌지시 태형이 아깝지 않냐고 물었다. 지민은 펄쩍 뛰었다. 뭐가 아까워? 내가 더 잘 벌어! 미영은 우물쭈물 저렇게 잘 풀릴 줄은 모르지 않았냐고 덧붙였다. 그건 맞는 소리였다. 멘탈 약하기로 소문난 태형이었다. 안 그런 척하면서 온갖 콤플렉스에 휩싸여 지민을 못 살게 굴던 태형이었다. 그런 태형이 멘탈싸움이라는 자격시험에 떡하니 합격해 감정평가사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잘지내?


또 카톡이 왔다. 바로 차단하려던 지민은 프로필명을 보고 움찔했다. 태태…. 김태형이 지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던 별명. 자신이 김태형 전역모에 새겨준 문구. 지민은 카톡을 확인하고 한동안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프로필을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3년 전,신입사원동기의 폰에 몰래 태형의 번호를 저장해서 확인했던 그 때처럼.


“이 씨발놈.”


태형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어떤 여자에게 신발을 신겨주고 있었다. 여자는 드레스를 양 팔로 들어 올리고 가는 발목을 드러낸 채 태형 쪽으로 사랑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태형의 커다란 손에 올려져있는 작은 하이힐. 자신은 절대로 못 신는 그것, 웨딩 슈즈.


잘지내?


슬펐냐고? 아니, 억울했다. 세월이. 태형이 망쳐버린 자신의 연애가치관이. 트라우마가. 다 억울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지민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자판을 쳤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태형의 인생을 조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오랜만이다? 난 잘 지내지ㅋㅋ


내 이 씨팔새끼를 반드시 꼬시리라.

@mysteryhomogirl

미호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