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2

폭풍의 갱냄스테이션


Dorothy - Raise Hell






잘지내


이모티콘 하나 없는 건조한 대꾸였다. 심지어 띄어쓰기조차 하지 않은 성의 없는 문장이었다. 내용은 더 기가 막혔다. 뭐 어쩌라고 너 잘 지내는 거 홍보하려고 카톡했냐? 아니면 프로필사진 보고 열 받으라고? 어느 쪽이든 좆같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영이 결혼식 오지? 미영이한테 얘기 들었어ㅋㅋㅋ


하지만 지민은 좆같을수록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쿼티를 치는 지민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다.


ㅇㅇ


ㅇㅇ? 이응이으응? 씨팔! 뭐하자는 거임? 님아?


“지민씨. 왜 이렇게 중얼중얼 욕을 해? 다 들려.”

“아, 죄송합니다.”


김주임의 타박에 민대리가 이쪽을 흘끔 보는 게 느껴졌다. 사내메신저 대화창이 켜졌다. 민대리다. [무슨 일 있어요?]. 예, 있습니다. 존나게 있습니다.


나도결혼해


지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만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일어나는 지민을 따라서 민대리의 시선이 움직였다. 지민은 비상계단에 이르러 악!! 비명을 내질렀다. 속에 얹힌 화가 조금 풀어지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카톡을 했다.


축하해ㅋㅋㅋ 죽어도 그 다음 문장이 생각하지 않았다. 지민은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려가며 어떤 말로 태형을 끌어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일단 끌어내서 얼굴을 마주봐야 뭘 어떻게 해볼 것이 아닌가. 카톡으로 씨부려봐야 진행되는 일이 없… 아, 씨발. 문득 떠올랐다.


김태형♥이유나의 행복한 모바일청접장 mcard.itscard.co.kr

오ㅋㅋ미영이 다음달이네?

ㅇㅇ

그래ㅋㅋㅋ

너도와

그래ㅋㅋㅋ


카톡으로 씨부려서 진행할 수 있는 일 중에 최악의 일이


너 취업했다며? 미영이 결혼 전에 얼굴 한 번 보자ㅋㅋㅋ 오랜만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장문의 카톡으로 이별을 고했던 김태형이 모조리 다 떠올라버렸다.


ㅇㅇ이번주금요일시간괜찮아?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2

폭풍의 갱냄스테이션












태형이 이렇게 덥썩 미끼를 물줄은 몰랐다. 오늘은 태형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지민은 과감히 월차를 냈다. 업무에 찌든 상태로 태형을 볼 수는 없었다. 정오까지 늘어져라 잔 지민은 늦은 오후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머리를 다듬으러 간 미용실에서 스타일리스트가 뿌염을 권했다. 그러고 보니 뿌리가 조금 나온 것도 같았다. 지민은 뿌염 대신 전체를 블랙으로 덮어달라고 했다. 스무 살 이후 흑발을 한 적이 없건만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지민도 제 자신을 모를 노릇이었다. 여자들은 실연하면 머리 자른다던데 그거랑 비슷한 건가? 지민은 곧 제 머리를 만지는 스타일리스트의 손길을 느끼며 잠에 들었다.


솔직히 고등학교 때는 태형과 친하지 않았다. 친한 게 뭐냐? 말 몇 마디 섞어보지도 않았다. 말해두었지만 그 시절 지민과 태형은 노는 무리가 달랐다. 태형은 소위 일진에 속하면서도 공부를 잘 하고 전교 1등의 여자친구가 있는 사기적인 스펙의 고교생이었고 지민은 그냥 고교생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장르가 다른 와중에도 둘은 몇 차례 얽힌 적이 있었다. 나중에 사귀고 나서 태형에게 물어보니 괘씸하게도 자기는 기억이 안 난다고해서 지민이 삼박사일을 삐졌던 일화도 있다.


지민만의 추억을 되돌아보면 태형과 처음 대화란 것을 나눈 때는 체육대회 날이었다. 태형은 지민의 2인 3각 파트너였다. 어찌된 연유로 키도 다르고 번호도 한참이나 떨어진 태형과 2인 3각 파트너가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쭈볏쭈볏 서있던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은 태형의 스스럼없던 스킨십과 연습 한 번 하지 않았는데도 꼭 한 발처럼 움직였던 묶인 두 다리다. 그날 태형과 지민은 2인 3각 결승전까지 올라가 2등을 거머쥐었다. 1등과 3등이 태권도부인걸 감안했을 때, 놀랄 만한 호흡이 아닐 수 없다. 2등 도장을 손등에 찍고 씩- 웃던 태형의 얼굴은 한동안 지민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태형은 지민이 수행평가로 그린 그림을 칭찬했던 적도 있다. 한창 미술시간에 유화를 배울 때였다. 유화는 쉽게 마르지 않아 미술이 끝나면 아이들은 저마다 캔버스를 사물함 위에 주욱 올려놨었다. 태형은 제 캔버스를 올려놓다말고 지민의 캔버스를 발견했다. 캔버스에 이름이 쓰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의 것인지 몰랐을 거다.


「이거 진짜 잘 그렸다.」


제비꽃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민 스스로 망쳤다고 생각한 그림이었다. 반 아이들이 너도나도 몰려들어 그림을 구경했다. 그리고 곧 태형의 칭찬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뒤집어엎고 새로 그려야하나 고민했던 지민에게 용기를 준 사건이었다.


또 한 번은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를 관람한 일이 있다. 어쩌다보니 지민은 태형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영화는 [노트북]이었다. 지민은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꾹 참았으나 마지막 장면에서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시기였다. 태형이 훌쩍훌쩍이는 지민에게 물티슈를 건네어 줬다. 오징어버터구이 콤보를 사면 껴주는 물티슈였다. 지민은 태형의 작은 친절에 감사해하며 물티슈에 코를 풀었다. 킁! 옆에서 태형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 얼굴이 빨개졌었던 건 비밀.


“다 되셨습니다.”

“..아, 예.”


지민은 잠에서 깼다. 방금까지 고교시절의 꿈을 꿔서인지 거울에 비친 스물일곱 박지민이 낯설었다. 스타일리스트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지민의 목에 둘러져있던 수건을 빼냈다.


“피부가 하얘서 블랙이 너무 잘 받으시네요. 남성분께 이런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되게 청순해지셨어요.”

“감사합니다.”


지민은 값을 치르고 나왔다. 퇴근시간대의 강남역엔 사람이 무진장 많았다. 모두들 표정이 좋았다. 그럴 만도 하지. 불금이잖아? 평소 같으면 지민도 저들 무리에 섞여 하하호호 웃고 있었을 거다. 지민은 태형과의 약속장소로 향했다. 태형은 지민에게 강남역 9번 출구에서 만나자고 했다. 9번 출구? 느낌이 쎄했다. 9번 출구는 지민이 클럽 갈 친구들과 합류하는 만남의 광장이나 다름없었다.


강남역? 웨이팅 쩔지 않으까?

내가예약해놓을게 와규괜찮지?


그러든가. 돈 좀 버나보다? 태형과 와규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생시절 태형과 지민은 샤브샤브조차 사치로 여겼다. 특히 태형이 돈을 많이 아꼈다. 제 딴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어찌됐던 지민은 그걸로 서운한 일이 많이 생겼었다. 헌데 그랬던 태형이.. 와규라니. 세상 참 좋아졌다.


지민은 태형과 만나기로 약속한 강남역 9번 출구에서 거울로 얼굴을 확인하며 서있었다. 지민의 폰이 울렸다. 당연히 태형일거란 예상과 달리 알림창에 뜬 이는 민대리였다.


지민씨 혹시 강남역이에요?


아, 씨발. 지민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다. 민대리로 보이는 인물은 없었다. 어딘가 들어가서 자신을 보고 있거나 지나가다가 발견했겠지.


네ㅋㅋ민대리님도?

차로 매스 앞 지나가다가 봤어요

아ㅋㅋ불금보내세요!

오늘 연차 아니었나? 옷차림이

ㅎㅎ면접봤어요

그래요?


그래요는 무슨 그래요야.


네ㅋㅋ친구만나세요?

응 지민씨는요?


민대리 이 새끼 은근 말 놓는 거 습관이다. 반존대하면 치명적일 줄 알아?!


저도 오랜만에 동창만나기로 했어요

둘 다 일찍 헤어지면 한잔 할래요?


씹었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다. 원나잇은 원나잇으로 끝내야만 한다. 지금도 충분히 골치 아픈 상황이다. 여기서 원나잇이 투나잇이 되어버린다면? 민대리와 프렌즈 위드 베네핏을 찍어야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민대리와 지민은 프렌즈도 아니다. 대화창을 나오자마자 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태형의 보이스톡이었다. 지민은 순간 기분이 아주 야리꾸리해졌다. 헤어지고 나서 3년 만에 온 전화다. 김태형 이 야멸찬 놈은 지난 3년 동안 지민에게 자니? 한 통 보낸 적이 없었다. 딴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전남친이 허구한 날 연락에.. 한 번 만나자고~ 만나자고~ 사정사정을 한다던데.. 김태형도 남주희한테 엄청 질척댄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그렇게 별로였나? 미련도 안 남을 만큼? 많이 싸우긴 했지. 지민은 제 성질머리가 그렇게 드러운 줄 태형을 만나면서 깨달았다. 아니면 남자애인이라서?


“왜 전화를 안 받아?”

“헉!”


지민은 갑작스럽게 고막을 찌르는 태형의 음성에 놀라 폰을 떨궜다. 기겁한 태형이 폰을 받아내려 했지만 폰은 얄궂게도 태형의 손을 맞고 튕겨나가 바닥에 처박혔다. 둘은 놀라서 폰이 추락한 지점으로 달려갔다. 지난달 산 아이폰7플러스의 액정에 금이 가 있었다. 지민은 이 금이 퍼지고 퍼져 결국 액정을 갈게 될 게 분명함을 직감했다. 시발! 불길하다. 불길해. 만나자마자 액정이 깨지다니.


“넌 손도 작은 애가 뭐 이렇게 큰 걸 들고 다녀?”


태형이 폰 상태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지민은 자신 옆에 쪼그려 앉은 태형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뭔 상관이야? 일어나서 폰을 건네주는 태형의 표정이 뚱했다. 지민은 태형의 신수가 훤해졌다고 생각했다. 잘생기기야 열일곱 처음 만났던 그 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잘생겼지만 태형에게도 우울한 분위기가 깃들어있던 시절이 있다. 이를테면 군대, 편입, 취준시절. 이 시절은 지민이 태형과 사귄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지민은 한 때 억울해했다. 나는 왜 빛나는 김태형과 사귀지 못했던 것일까? 왜 우울하고 다혈질에 콤플렉스 덩어리였던 김태형에게 반했던 걸까? 견디다 견디다 못해 손에서 놓고 나니 김태형은 다시 반짝반짝 빛이 나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다.”


지민은 지금 제 표정이 어떨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


복잡한 강남역 9번 출구 앞, 둘은 오랫동안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먼저 입을 뗀 건 태형이었다.


“이쪽.”


태형이 지민을 뒤로하고 척척 걸어갔다. 매너가 1도 없다. 하긴, 매너 지킬 필요가 있나? 지민은 보글보글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속을 진정시키면서 태형을 따라갔다. 태형이 안내한 곳은 매스 사거리 앞에 위치한 화로구이집이었다. 와규, 갈비, 와인을 같이 팔아 소개팅 장소로 인기가 좋은 곳이었다. 지민도 몇 번 와본 적이 있다. 마지막에 방문했을 때, 앞에 앉은 연상의 소개팅남이 지껄였던 얘기가 떠올랐다. 지금은 얼굴도 기억 안 나는 놈이다. 지민씨, 소개팅 할 땐 고기가 좋대요. 고기에는 트립토판이 많은데 이걸 씹으면 세로토닌이 분비되어서 기분이 좋아진대요. 저 지민씨랑 잘해보고 싶어서 여기로 왔어요.


“예약하셨나요?”

“네. 김태형이요.”

“저 따라오세요.”


그 형이랑은 결과적으로 잘 안 됐다. 과정적으로는.. 두어번 자고, 영화도 보고, 그 사람 친구가 하던 카페도 가보긴 했는데.. 그냥 흥미가 떨어졌다. 자신이 잠수를 탔던 걸로 기억한다. 그 사람도 한 사흘 연락을 하다가 말았으니 쌤쌤으로 치자.


“뭐 먹을래?”


태형이 지민 쪽으로 메뉴판을 드밀었다.


“삼겹살에 소주 할래? 아니면 삼겹살먹고 소갈비 섞어도 되고. 돼지모듬 소짜도 괜찮을 것 같다.”


맘 같아선 와규꽃살 10인분을 시키고 싶었지만 참았다. 김치남으로 보여선 안 되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또.. 태형이 돈 번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어때?”


하면서 지민이 태형의 얼굴을 확인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뚱했던 태형은 이제 숫제 똥을 집어먹은 얼굴이다. 태형의 표정을 확인한 지민은 기분이 나빠져 복수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어졌다. 너 이럴 거면 왜 만나자고 했어?! 태형이 벨을 눌러 서버를 불렀다. 서버 쪽으로 메뉴판을 넘기면서 능숙하게 주문했다.


“와규꽃살 3인분에 덴마크 치즈 16피스 주시구요. 와인은.. 이거. 말리상 생떼 밀리옹. 너 밥 먹을 거지?”

“..으응.”


지민은 고기 먹을 때 꼭 밥과 같이 먹어야 했다. 태형이 촌스럽다며 놀리던 취향이다.


“공기밥 1개도요.”


지민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타닥타닥 두드렸다. 방금 주문한 것만 10만원이 훌쩍 넘었다. 얘가 미쳤나? 돈 번다고 눈에 봬는 게 없나보다. 아니면 구남친 앞이라 일부러 가오 잡는 건가? 결혼 앞둔 애가 생각 없이! 아,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이렇게 된 거 다 해치우고 3인분 더 조져야겠다. 지민은 전투적으로 젓가락을 세팅했다.


“넌 하나도 안 변했다.”


지민은 어색 떨어봐야 자기만 손해일 것을 알았다. 일부러 능청스럽게 태형에게 말을 붙였다.


“학교는 졸업했어?”

“작년에.”

“졸업하고 바로 공부한 거구나. 1년 만에 합격하는 사람 드물다던데 잘 됐네.”

“뭐..”

“일은 할 만해?”

“괜찮아.”


서술형으로 대답하라고. 서술형으로! 단답형 말고! 태형은 앞에 나온 물수건으로 손만 계속 닦았다.


“여자친구랑은 얼마나 만났어?”


알면서 일부러 그렇게 물었다. 태형의 손이 뚝 멎었다. 잠잠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지민 쪽으로 향했다. 지민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3년.”

“나랑 헤어지고 바로 사귀었나 보네.”


그렇지. 나랑 헤어지고 나서 바로 사귀었지. 2주 만에. 분위기가 아슬아슬 해졌을 때쯤 고기와 와인이 나왔다. 비싼 게 양도 조금이다. 지민은 핀셋을 집어 들고 플레이트에 몇 점씩 뚝뚝 떨어져 세팅된 고기를 화로 위로 올렸다. 아, 씨발. 실수했다. 태형이 굽게 했어야 하는데. 갑자기 핀셋을 집어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지민은 그냥 열심히 고기를 구웠다. 옛날부터 태형은 고기 한 점 제 손으로 굽지 않았다.


“넌 만나는 애 없어?”

“없어.”

“왜?”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난 연애병신이 되어버렸어. 어떻게 책임질래? 책임은커녕 나한테 청첩장 찔러주려 왔잖아, 너. 뭔 생각이야? 나한테 조금의 미안한 마음도 없어? 한 사람 인생 이렇게 뭉개놓고 걔랑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 같아? 양심이란 게 있기는 하냐?


“그냥 몇 번 만나다가 깨지고 만나다가 깨지고..”

“남자?”


지민은 핀셋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앞에 앉은 태형을 쏘아보았다.


“응. 남자. 난 남자 좋아하잖아. 너랑 다르게.”


둘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지민은 와인을 무식하게 원샷했다. 태형도 질세라 와인을 원샷했다. 그 뒤로 둘은 말없이 고기와 와인을 축냈다. 몇 마디 섞지도 않았는데 벌써 두통이 오고 속이 미식거렸다. 태형과 싸울 때마다 나왔던 증세다. 태형 역시 낯빛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민은 궁금해졌다. 자신은 복수를 하러 왔다 치고 태형은 도대체 이 자리에 왜 나온 것일까? 왜 만나자고 한 것일까? 태도를 보아하니 확실히 미련은 아니었다. 지민은 고기를 질겅질겅 씹었다. 세로토닌이라도 한껏 분비되었으면 좋겠네. 지금 기분으론 태형과 뭘 해보고 싶지가 않으니.


“아까 질문은 내가 무례했어.”


무례, 무례라. 어색한 단어다. 무례를 따지는 사이가 되었구나. 지민은 입 속에 잘게 부서진 고기를 삼켰다. 그리고 태형을 향해 그 어느 때보다 예쁘게 웃었다. 3년간 밤생활을 하면서 갈고닦은 무기였다. 더 이상 어수룩하고 순진한 박지민이가 아니다 이거야.


“아냐, 괜찮아. 야. 여자친구 얘기 좀 해봐. 몇 살이야?”

“연상이야. 서른.”

“아, 그래서 일찍 가는 거?”


여자가 연상인 건 페이스북 댓글 염탐을 통해 알았지만 세 살이나 위일 줄은 몰랐다. 남자 스물일곱에 결혼이면 굉장히 일찍 가는 축에 속했다. 그래서 처음 태형의 프로필사진을 봤을 때, 이 새끼도 사고를 쳤나 싶었다. 태형은 고기를 뒤적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라? 등 떠밀리듯 하는 결혼이라 이거지? 그럼 꼬시기 더 쉽겠군. 지민은 와인을 한 잔 더 마셨다. 이따위 와인 빨리 해치워버리고 소주를 시켜야 될 것 같았다. 모든 사건사고는 알콜로부터 기인하니까.


“너 술 안 좋아하지 않았나? 소주 반병만 마셔도 헤롱 거렸잖아.”

“지금은 안 그래.”


호랑이 담배 말아 피던 시절 얘기를 하고 있다. 더해서 말은 바로하자. 내가 언제 술을 안 좋아했냐? 네가 못 마시게 해서 못 먹었던 거지.


“뭐 하는 사람이야?”

“승무원하다가 관두고 지금은 옷 팔아. 인터넷쇼핑몰 준비하면서.”


것도 알고 있었다. 인스타그램에서 꽤 유명하더라. 욕도 엄청 먹던데? 마진을 사기적으로 뗀다고?


“인터넷쇼핑몰 창업 성공하기 힘들지 않나? 레드오션이잖아. 내 친구도 했다가 쫄딱 망했었는데~ 결혼한다고 모아놨던 돈 다 날리구~ 잘 될라나?”


아! 아! 존나 속 시원해!


“잘 됐으면 좋겠다~”


아! 아! 난 이 날을 위해 취업하고 회사에 다닌 듯 해! 지민은 쾌감에 부르르 떨리는 몸을 티 나지 않게 숨겨야 했다. 태형의 눈이 가늘어졌다.


“취했냐?”


지민이 비아냥거리는 걸 눈치 챈 듯싶었다. 아씨, 꼬셔야 되는데 왜 자꾸 싸우게 되지? 쌓인 게 많아 그런가봐.


“돈 나보다 잘 벌어. 착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야. 나 힘들 때 뒷바라지 해줄 만큼.”

“….”


뭐? 이런 개씹..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저거? 내가 언제 네 뒷바라지 안 해준 적 있냐? 뒷바라지는 내가 먼저다, 이 씹새끼야. 네가 싫다며, 네가 다 관두고 싶다며, 짜증난다며! 날 보기만 해도!


“그래? 잘 살겠네.”

“어. 잘 살아야지.”


또 침묵이 이어졌다. 지민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슬슬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자신과 주량이 비슷한 태형도 마찬가지 일 터였다. 꾸며내는 거, 인이 박힐 만큼 했다고 자부하는데 태형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지민은 남은 와인을 원샷하고 태형에게 물었다.


“왜 보자고 했어? 청첩장 주려 불렀다는 개소리 말고.”

“보자고는 네가 했잖아.”

“아니 애초에 먼저 카톡한 거 너잖!.. 후-”


한 마디도 지질 않는다. 지민이 크게 한숨을 내 쉬자 태형도 남은 와인을 원샷했다. 또 얼마간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여자친구가 가톨릭이야.”

“뭐?”


뭐라는 거야? 지민이 의문을 표하든 말든 태형은 할 말을 이어갔다.


“결혼 전에 혼인강좌를 수료해야 된다고 해서 갔었어. 그 강좌에서 그러더라. 지나간 관계들을 돌이켜보라고.”

“….”

“그 관계들이 남긴 부정적인 면을 보는 대신에 미래에 교훈으로 삼을 만한 점을 찾으라고. 주희랑 지영이 한테서는 그게 찾아졌거든? 근데 몇날며칠을 고민해도 너한테선 찾을 수가 없었어. 네가 남긴 상처, 시간낭비, 싸웠던 기억 밖에 안 떠오르는 거야. 그래서 물었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누구한테 뭘 물었단 말이야? 목적어 좀 똑바로 말해.


“결자해지 하라고 하더라.”

“…그래서 뭘 어쩌자고?”


태형이 와인병을 집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와인은 이미 동이 났다. 고기는 다 탔고, 지민 앞엔 양념장이 묻은 공기밥이 반 공기 놓여있다. 꼭 태형과 자신의 관계 같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되돌릴 순 없으니까.. 우리 다시 사귀자.”


지민은 처음에 제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시간 뭐 어쩌고 한 것까지는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은, 그 다음 말은.. 다시 사귀자고?


“돌았어?”


지민은 태형을 꼬시기로 맘먹었던 것을 망각하고 물었다.


“아니.”

“그럼 취했어?”

“아니.”

“내가 취했나?”


지민은 두 손으로 볼을 감싸 쥐어봤다. 뜨끈뜨끈 열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 그래. 내가 취해서 이상하게 들었나봐.


“한 달만 다시 사귀자. 미영이 결혼식 전까지.”

“….”

“다시 사귀면서 서로 앙금 있던 것도 풀고 잘못했던 것도 바로 잡아주고.. 그러고..”

“….”

“우리 아름답게 헤어지자.”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이 있을까? 모르겠다. 최소한 예의 있는 이별, 뒷맛이 찝찝하지 않은 이별은 있을 거다. 지민은 태형의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점점 끌려가고 있었다. 제 스스로 호랑이 굴에 발을 들여 준다는데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그러자.”

“어?”

“일리 있네. 무르기 없기다?”

“..어.”

“너 한 달 동안 여자친구한테 어떻게 하냐?”

“여자친구는 몰라.”

“그러니까 어떻게 하냐고. 나 막 불러낼 건데.”


지민이 태형을 보면서 배시시 웃었다. 태형은 목구멍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 바빠. 쇼핑몰이랑 신혼집 리모델링 때문에.”

“너한테 안 시켜?”

“나 취업한지 얼마 안 됐잖아. 배려해주는 편이야.”

“아~”


배려, 배려, 그놈에 배려. 자기는 배려 안 해줬나? 이것도 다 말해야겠다. 오늘 말고 다음…


“어?”


속으로 비아냥거리면서 창밖을 보던 지민의 눈이 크게 뜨였다. 태형이 무슨 일이냐며 지민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지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밖으로 보이는 매스사거리에 정국이 있었다. 정확히는 매스 앞에. 정국이 가드와 몇 마디 말을 나누고 안으로 들어가는 걸 똑똑히 보았다. 지민의 머리가 빨간 불이 들어왔다. 임신한 절친의 예랑이가 클럽에 들어가는 걸 목격한다면 누구라도 지민과 같은 반응을 보일 거다.


“야, 야! 나 급한 일 있어서 먼저 간다! 연락할게!”

“뭐? 야! 박지민!”


지민은 눈 깜짝할 새 가방과 수트 재킷을 챙겨 나왔다. 태형은 허겁지겁 짐을 챙겨 지민을 따라 나섰다.


지민은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셔츠의 단추도 네 개나 풀어헤쳤다. 드라이기로 단정히 세팅한 머리를 손으로 우악스럽게 헤집었다. 수트케이스는 들고 있던 자켓으로 살짝 덮어 가렸다. 건물에서 나와 매스 앞까지 이르는 스무 걸음 안에 이 모든 것이 이뤄졌다. 지민이 가드 앞에 섰다. 가드가 형식상으로 신분증을 확인하고 지민을 들여보내주었다. 이른 시간이라 줄을 서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씨발, 쪽팔려. 게스트로 입장하다니. 계단에 이르자 쿵쾅거리는 비트가 온 몸으로 느껴졌다. 지민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스테이지에는 벌써 사람이 꽉 차있었다. 봉을 잡고 흔드는 여자들, 광질하는 대학생들, 2층에서 스테이지를 훑는 20대 후반 남자들을 샅샅이 관찰했다. 어디에도 정국은 없었다. 스테이지가 아니면 라운지에! 라운지는 테이블을 잡은 사람만 입장이 가능한 곳이다. 이 개새끼 그냥 놀러온 것도 아니고 본격적으로 놀러왔구나? 지민은 라운지 앞을 서성였다. 지민의 밴딩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한 무더기의 남자들이 여자들을 데리고 라운지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지민 역시 일행인 척 맨 뒤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라운지로 입장했다. 여자는 뭐야! 하면서 뒤를 돌아봤다가 타이밍 좋은 지민의 미소에 사르르 녹았다. 지민은 라운지에 입장하자마자 여자를 내팽겨 쳤다. 어디 있냐! 어디 있냐! 이 놈! 그때 뒤에서 실랑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뒤를 돌아봤다. 태형이었다. 태형이 가드를 붙들고 뭐라뭐라 설명하고 있었다. 헐? 자신을 따라왔나 보다. 지민의 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발신자 김태형. 지민은 일단 무시했다. 정국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찾지 못하더라도 영상이라도 남겨 미영에게 보여줘야 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In a new mode I will find you so we can start miracles

In a new mode we can try to feel invincible

Can you feel. Can you feel

In a new mode we can try to feel invincible


찾았다! 정국은 쇼파에서 신나게 뛰놀고 있었다. 정국의 손에 들린 휴지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정국의 양 옆에는 가슴사이에 야광봉을 껴 넣은 거유들이 미친 듯이 몸을 흔들고 있었다. 저, 저, 씹새끼! 이게 총각파티래도 지민은 용납이 안 되었다. 지민은 사람들을 밀치고 정국의 앞으로 나아갔다.


“야!!!!”


정국이 지민을 쳐다봤다. 빰! 음악이 터졌다. 정국은 지민을 놀리듯이 노골적으로 쳐다보면서 웨이브를하고 스텝을 밟고 휴지를 날리고 아주 지랄 난리를 다 쳤다. 지민은 내내 그 꼴을 노려보다가 노래가 넘어가는 타이밍에 정국을 끌어냈다. 정국은 순순히 지민에 손에 끌려왔다.


“너 뭐야?!”


라운지 화장실 통로로 정국을 밀어 넣은 지민이 씩씩대면서 물었다.


“뭐가요?”


정국이 뒷주머니를 뒤적였다. 설마 했는데 역시 담배다. 정국이 담배를 찾아 불을 붙였다. 그리고 지민 쪽으로 연기를 푸- 뿜었다. 미친..! 존나게 잘생겼네!


“아직도 담배 피는 남자 좋아해요?”

“…!”

“섹시하다며.”


아, 개좆됐다. 자신은 비흡연자지만 피는 거 보는 건 좋아한다고.. 담배 피는 남자 섹시하다고 하는 말은 지민이 술만 취하면 중얼대는 소리였다. 정국이 어떻게 그걸 알고 있을까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와 놀거나.. 혹은..


“어떻게 하나도 기억을 못하지?”

“어, 언제 만났지? 우리?”


잤거나.


정국이 담배연기를 공중으로 흩어 보냈다. 아아아, 너무 취향이라서 심장이 다 저릴라 그래. 미쳤냐? 제발. 인륜도덕은 좀 지키고 살자. 박지민아.


“부산 플럭스에서 한 번, 도쿄 아게하에서 한 번. 앤써에서도 마주쳤고, 강남역에서는 미영이랑 봤고.. 그리고 오늘. 우연이 계속되면 인연이라는데 우리 진짜 기막힌 인연 아니에요?”

“..그럼 미영이도 같이 봤겠네.”

“기억 안나. 그 땐 너밖에 안 보였어.”


진심 어뜩하냐. 이 새끼.


“너 진짜-”


빰! 또 노래가 터졌다. 정국이 담배를 버리고 지민에게 달려들었다. 지민은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 신음을 내뱉느라 열린 입 안으로 정국의 혀가 들어왔다. 일반클럽에서 남자끼리 키스라니. 쳐돌은 게 분명하다. 정국은 폭풍처럼 키스했다. 으어억- 소리가 절로 나오는 키스였다. 정국이 혀뿌리를 뽑을 듯이 빨아올리고 입술을 콱콱 깨무는 통에 지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얘 약했나? 얼마가지 않아 지민의 몸이 달아올랐다. 사라져가는 양심을 가까스로 붙들어 정국의 가슴을 팡팡 쳐낸 게 지민이 한 반항의 전부다. 그 때, 퍽! 소리와 함께 정국이 나가 떨어졌다. 태형이었다. 태형은 지민이 정신 차릴 새도 없이 지민의 손목을 잡아채 끌었다. 지민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클럽 밖으로 끌려나왔다.


“너 뭐야!”


태형은 아까 지민처럼 노성을 질렀다.


“쟤는 뭔데! 뭔데 너한테!”


지민은 태형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을 뿐더러 정국을 뭐라 소개해야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저, 전남친이야.”


술만 취하면 헛소릴 한다고 했던가?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어차피 어두워서 얼굴은 못 봤을 공산이 컸다. 지민은 일단 태형을 잡아끌어 매스 앞에서 벗어났다. 혹시라도 정국과 마주치는 불상사는 피하고 싶었다.


“전남친?”

“어..”

“너 전남친 뒤캐고 다니냐?”

“어?”


태형이 싸늘한 눈으로 지민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한테도 그랬어?”

“아니?! 절대!”


물론 태형 여친의 페북이나 인스타를 몇 번 염탐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게 다였다. 태형은 지민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지 눈에 준 힘을 풀 생각을 안했다.


“우리 사귀기로 한 거 맞지?”


태형이 물었다.


“어. 그랬잖아.”


지민이 대답했다.


“사귀는 동안 나한테 충실해. 다른 사람은 안 돼.”

“넌 여친 있잖아. 나만 너무 불리한 거 아니냐?”


태형은 답이 없었다. 지민은 설왕설래를 포기하기로 했다. 뭐 얘가 하지 말라고 내가 안 할 것도 아니고.


“알았어. 그럴게.”

“어.”


얄미운 새끼. 태형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에 뜨는 이름이 ♥뿌♥ 였다. 뿌는 무슨 지랄이다. 진짜.


“어, 유나야. 응. 지금 다 먹었어. 어, 이제 집 가려고. 응응. 술 거의 안 마셨어. 어, 어, 친구는 갔지. 그래.”


지민은 팔짱을 끼고 태형이 전화하는 꼴을 지켜봤다. 유나는 태형의 전화를 끊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집 갈때까지 전화하자고 하는 목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지민은 입모양으로 간다고 말했다. 태형이 잠깐이라면서 지민을 잡으려 했지만 지민은 골목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좆같다..”


정말 기분이 좆같았다. 취기는 오르고 머리는 하나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몇 시간 사이에 태형과 다시 사귀게 되었고, 정국이 클럽에 들어가는 걸 봤고, 키스를 했고, 알고보니 몇 번 만난 사이고, 잤을 지도 모르고, 태형이 정국을 때렸고, 나와서는 자기더러 딴 놈 만나지 말라했고, 이유나한테서 전화가 왔고, 무슨 바람피는 사람처럼.. 개같아. 다 개같아! 어느 정도 일이 제가 의도한대로 진행되었음에도 기분이 쓰레기였다. 이 상태로 집에 들어갈 순 없었다. 지민은 24시간 카페로 들어가 민대리에게 카톡을 보냈다.


어디에요


민대리도 취했나보다. 대뜸 반말 찍찍 싸는 걸 보면..


술 마셔요

넌 어딘데

여기 신논현역 쪽 탐탐

5분만 기다려


다행이다. 민대리가 적극적이어서. 지민은 민대리와의 카톡을 마치고 카톡 차단친구 목록으로 들어갔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스크롤을 내리던 지민의 손가락이 뚝 멎었다. JK. 아, 연락처도 줬었구나..


“나 소개팅 중이었어.”


민대리가 술냄새를 폴폴 풍기며 비어있던 지민의 앞자리에 앉았다.


“남자요? 여자요?”

“남자.”

“원래 그 쪽이었어요? 결혼은 왜 했어?”

“이 나이되면 하기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어.”

“무슨 다섯 살 밖에 차이 안 나면서..”

“20대랑 30대랑은 확 다르지. 너도 서른 돼봐. 피부로 와 닿을 걸?”

“세월이?”

“아니, 책임이.”


민대리가 담배를 빼어 물었다. 헉.. 민대리한테도 말했었나?


“그게 남자의 책임인가? 서른 몇 살 되면 결혼하고 그러는 거?”

“결혼 얘기 하지말자. 오늘 법원 다녀왔으니까.”


지난 번 회식이 끝나고 둘만 남은 자리에서 민대리는 자신이 협의이혼을 했으며 지금은 숙려기간이라고 말했다. 아내는 직장상사였단다. 그래서 관둔 거라고. 지민이 알기로 민대리의 전 직장은 업계에서 연봉도 최고로 많이 주고 복지도 끝내주는 데다. 그 좋은 회사를 박차고 나오는 심정은 어땠을까? 이혼 할 때의 심정보다 더 착잡했을까?


“완전히 쫑난 거예요?”

“응.”

“한 달 만에?”

“일 년 밖에 같이 안 살았다고 한 달 만에 정리해주더라. 나 지금 이혼남 타이틀 달아서 언짢아. 그만해.”


민대리가 질문을 막았다. 궁금한 게 많은데 어떻게 해. 나는 평생 할 일 없는 결혼이잖아.


“니가 망친 내 소개팅 어떻게 보상할거야?”


민대리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면서 물었다.


“어차피 하루 만나고 말 거 아니였어요? 술 마시고 있었다며”


하- 기가 차다는 민대리의 웃음. 그리고 지민의 뇌리를 스치는 김태형의 말. 「사귀는 동안 나한테 충실해. 다른 사람은 안 돼.」. 그럼 이건 바람쯤 되려나? 복수의 시작이 꽤나 산뜻하다. 지민이 민대리를 보면서 야살스럽게 눈웃음을 쳤다.


“그럼 저로 대신 해요. 재밌게 놀아줄게.”

미호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