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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4

마지막 한 방울


CAKE - Never There

♥하이(http://kookipark.postype.com)님이 주신 선물♥
♥하이(http://kookipark.postype.com)님이 주신 선물♥





「어?」


내내 지루한 표정이던 정국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정국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백인남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신나게 몸을 흔드는 지민이 있었다. 정국이 아는 얼굴이었다.


지난여름, 정국은 제대를 하고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부산 본가에 머물렀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긴 했으나 스무 살 이후 계속 서울에만 거주했기 때문에 부산의 밤문화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전무했다. 심지어 군대도 서울에서 근무했다. 휴가를 나와도 집에 내려가기는커녕 동기들 자취방을 전전하며 밤에는 클럽으로 출석도장을 찍으러 다녔다. 정국은 부산에 머무는 동안 부산의 모든 클럽들을 섭렵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플럭스에 입장했다. 8월 초 부산의 밤은 좀 그런 구석이 있다. 도시 어딜 가나 축제분위기이고 들뜬 표정의 사람들은 쉽게 벽을 허물고 서로에게 다가갔다. 길거리만 해도 그 지경인데 해운대나 클럽은 말할 것도 없는 향락의 도가니탕이었다. 휘유~ 터진다. 터져. 노래도 터지고 사람도 터졌다. 여기서 진짜 부산사람은 이십퍼센트도 안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전국 팔도의 유흥객이 모이는 부산의 클럽, 에어컨이 빵빵한데도 사람들의 땀은 식을 새가 없었다. 오늘 울프팩 온대요! 정국 옆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놀던 여자가 묻지도 않은 걸 알려줬다. 유명 DJ인가보다. 정국은 클럽은 좋아했지만 DJ니 노래니 하는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힙합은 지루했고 몸을 마구 흔들 수 있는 일렉이 좋았다. 남자 두 명이 DJ 테이블에 등판했다. 사람들은 숨넘어갈 듯 비명을 지르고 앞으로 나아갔다. 정국도 그 분위기 휩쓸려 앞쪽으로 이동했다. 정국 주변은 곧 출근시간대의 9호선 마냥 사람 사이 간격이 좁아졌다. 몸을 제대로 흔들 수가 없었다. 정국은 자신 앞에 찰싹 달라붙은 남자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정국의 페니스가 남자의 엉덩이에 비벼지고 있었다. 노멀이라면 기겁을 하고 어떻게든 내뺐을 상황이었다. 헌데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뒤를 돌아 정국의 얼굴을 확인했다. 정국의 시야에 지민의 얼굴이 가득 잡혔다. 불빛에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광란의 춤사위를 보여주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지민이 씨익 웃었다. 지민의 미소는 정국에게 영화의 한 장면같이 극적으로 와 닿았다. 지민은 다시 앞을 봤다. 그러더니 노골적으로 정국의 페니스에 엉덩이를 갖다 댔다. 정국 역시 지민의 골반을 그러쥐었다. 페니스로 통통한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아, 대박. 일반클럽에서 남자랑 떡춤을 출 줄이야. 미쳤다는 자각은 있었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둘은 오랫동안 질척하게 놀았다. 정국이 지민의 번호를 땄다. 내밀어진 폰을 본 지민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번호를 찍고 통화를 눌렀다. 그래서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정국은 지민의 귀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나가자. 그 소릴 들은 지민이 픽 웃었다. 나 여기 백만원 주고 테이블 잡았어. 정국은 머리는 찬물을 끼얹은 듯 띵해졌다. 그래서 어쩌라고? 안 나갈 거야? 지민은 웃는 낯 그대로 정국의 곁을 떠났다. 정국은 어안이 벙벙해져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런 일방적인 퇴짜는 정국이 전씨 집안 호적에 이름을 올린 이후 처음이었다. 지민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상황을 파악한 정국이 고개를 휙휙 돌려 지민을 찾았다. 지민은 테이블에서 웬 여자한테 귀를 빨리고 있었다. 바이인가? 둘은 눈이 마주쳤다. 지민이 아직까지 솟아있는 정국의 페니스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국은 자존심이 상해 지민에게 관심을 껐다. 아니, 끈 척했다. 지민 보란 듯이 지민의 귀를 빨던 여자애를 꼬셔 클럽을 나왔다. 지민은 정국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자애는 정국 타입이 아니었을 뿐더러 정국은 떡칠 기분도 아니었다. 그래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튀었다. 아무리 하룻밤 놀이라도 어지간하면 매너를 지키는 정국에게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정국은 그 후로도 가끔 그날 밤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하면 어땠을까? 저렇게 하면 어땠을까? 시뮬레이션해보곤 했다. 멘트가 너무 구렸어. 아냐, 얼굴이 별로였던 거 같아. 제대한지 얼마 안 되어서 군바리 티 팍팍 났을 거야. 테이블 없이 스탠딩으로 입장해서 무시한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아,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때려 쳐! 빡친다. 빡이가 쳐. 돌아버릴 것 같다. 그때 그 씨발년 머리채를 끌고 나왔어야하는데.


그리고 그 씨발년이 정국의 눈앞에 다시 한 번 나타난 것이다. 임용고시 준비 전에 마지막으로 화끈하게 놀자며 동기들과 떠난 여행이었다. 첫날 시부야의 클럽들은 정국의 기대완 다르게 뭔가.. 뭔가 심심했다. 입장료만 드럽게 비싸게 받고 노래는 빅뱅의 판타스틱 베이비같은 걸 틀어줬다. 감주야? 뭐야? 설상가상으로 물도 구렸다. 정국 취향의 영장류는 단 한명도 없었다. 사람들은 소극적으로 몸을 흔들었다. 좀 잘 논다 싶으면 한국인이었다. 역시 란콰이퐁에 갔어야 해. 잘못된 선택이었어. 둘째 날 정국의 일행은 아시아에서 다섯 번째로 크다는 클럽 아게하에 발을 들였다. 규모는 입이 쩍 벌어질 만큼이긴 했다. 입장하는 데만 3개의 관문을 지나야 했다. 몸수색, 짐수색, 여권검사를 다 마치고 겨우 입장을 했을 때, 정국은 클럽 안 꼴을 보고 개탄했다. 뭔 외국인이 이렇게 많아? 그것도 중동계사람들이. 아게하 안에는 다인종의 사람들이 인종만큼이나 다양하게 후줄근한 옷을 입고 섞여 놀고 있었다. 뭐랄까.. 이곳도 자신의 취향은 아닐 거란 느낌이 빡 왔다.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전의를 상실하고 남들 노는 걸 지켜보던 정국의 눈에 지민이 포착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


내내 지루한 표정이던 정국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정국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백인남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신나게 몸을 흔드는 지민이 있었다. 정국이 아는 얼굴이었다. 정국은 앞뒤재지 않았다. 달려가서 지민의 팔뚝을 낚아챘다. 지민은 만취한 상태였다. 눈이 아주 맛이 가 있었다.


「저 알죠? 한국인 맞죠?」


지민은 몸을 못 가눴다. 어깨동무한 백인의 몸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정국을 오래 응시했다. 정국은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지금 개꽐라된 거 맞지? 기억 못 할 것 같아.


「부산에서」

「….」

「플럭스에서 만났었잖아.」


지민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더니


「헤에~?」

「….」

「와따시와 니혼진데수! 한코쿠진데와나이! 사요나라!」

「….」


백인 남자가 키득키득 웃으면서 지민에게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워줬다. 정국은 그 엄지를 부러뜨려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자신에게 가라고 손을 흔드는 이 꽐라의 손목부터 부러뜨린 후에.


정국은 백인남자와 부비부비하는 지민을 계속 지켜봤다. 지민은 취한 와중에도 시선을 느꼈는지 간간히 정국을 보며 야릇한 눈빛을 쏴댔다. 정국은 기가 막혔다. 정국의 안에서 두 개의 자아가 싸우고 있었다. 머리채를 잡고 끌고 나왔어야 한다며? 또 후회할래? 관둬. 쟨 너한테 관심 없어. 이렇게까지 들이댔는데도 저러는 거보면 각 안 나오냐? 격 떨어진다. 질척거리지 말자. 지민이 백인남자를 밀어내고 비틀비틀 어딘가로 걸어갔다. 백인남자가 지민 뒤로 따라붙으면서 팔을 잡았다. 지민은 잡힌 팔을 쳐내면서 뻑큐를 날렸다. 백인남자는 지민에게 항의하듯이 달려들었으나 지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지민은 밖으로 나가서 길바닥에 혼자 주저앉아있었다. 그 꼴을 보니 담배가 말렸다. 일본이니까 일제를 펴줘야 한다고 해서 가져온 마쎄는 제 취향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정국은 담배를 뻑뻑 피면서 지민 옆에 쪼그려 앉았다. 지민이 인기척을 느끼고 옆을 보았다.


「어? 잘생겼다.」

「….」


어이가 아리마셍이었다. 방금 전에 만난 것도 기억을 못하는 구나. 자신만만치 않은 알콜쓰레기에 또라이다. 정국이 지민을 쳐다보면서 담배연기를 뿜었다.


「한 번 더 해봐. 섹시해.」

「….」

「물, 물 먹고 싶어! 물 사와!」

「존나 와따시와 니혼진이시라면서요?」

「무우우울! 물!」


막무가내였다. 정국은 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 핫도그와 에이드를 파는 푸드트럭이 보였다. 뛰어 갔다 오면 1분도 안 걸릴 거리였다.


「너 여기서 딱 기다려.」

「우오터! 우오터! 김 미 썸 우오터!」

「알았으니까 닥쳐!」


정국은 푸드트럭을 향해 달려갔다. 주머니에서 허겁지겁 현금을 꺼내 점원에게 내밀었다. 아나, 좆같은 부가가치세 제도. 점원은 한참 동전을 찾아 거슬러줬다. 정국은 에이드와 거스름돈을 받아들고 몸을 돌렸다.


「….」


정국의 손에서 에이드 컵이 와그작 구겨졌다. 에이드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 손가락 사이사이를 타고 흘렀다.


「존나 골 때리네. 썅년.」


지민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4

마지막 한 방울














그 씨발년이, 그 썅년이 지금 정국 앞에 불편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누가 봐도 지민은 가시방석에 억지로 앉혀진 사람이었다. 미영이 눈치 없는 건 애 저녁에 안 사실이지만 태형도 만만치 않은 놈이구나 싶었다. 둔한 두 명이 메뉴를 고르는 동안 정국은 맞은편에 앉은 지민을 노골적으로 쳐다봤다. 지민 역시 노골적으로 정국의 시선을 피했다.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저 새끼가 진짜 처돌았나. 어제는 취해서 그랬다 치고 오늘은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지금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야? 죄를 지었으면 숨길 생각을 해야지. 쟨 왜 드러내서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지? 지랑 나랑 옆에 미영이 두고 맥주잔 기울이는 게 말이 되냐고.. 지민은 태형도 은근히 신경 쓰였다. 아직까지는 못 알아보고 있지만 불현듯 떠오를 수도 있는 일이고 더불어 정국이 아까처럼 티를 낸다면 아무리 눈치 없는 태형이라도 이상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근데 세 분 다 고 1때 같은 반이셨어요?”

“응. 우리 셋 다 같은 반이었어~”


미영이 에피타이저로 나온 미트볼을 게걸스럽게 해치우면서 대답했다. 미영은 요즘 부쩍 식욕이 늘었다. 정국은 점점 덩치를 불려가는 미영의 복부를 보면 있던 성욕도 뚝뚝 떨어졌다. 지금도 좋은 말로 천천히 먹으라고 달래고 있지만 속마음은 그만 좀 처먹으라고 외치는 중이었다.


“그럼 그때부터 친하셨던 거예요?”

“아니. 김태형 우리랑 안 놀아줬어. 얘 되게 잘 나가서 우리 같은 애들 말고 막 일진들이랑 놀았어.”

“야! 무슨!”


태형이 발끈했다. 지민은 별 말이 없었다. 사실인가 보다.


“그러다가 나랑 고 2때 같은 학원 다니면서 엄청 친해졌고~ 지민이랑은 나중에 졸업하고..”


미영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지민과 태형 눈치를 봤다. 정국은 딱 감이 왔다. 그렇게 된 일이구나?


“지민이랑은 그 이후에 친해졌어요. 저 상병휴가 나와서 미영이랑 친구들 만나는 데에 지민이가 왔었거든요.”


태형이 미영 대신 말을 마쳤다. 정국은 지민을 관찰했다. 지민은 무표정으로 물 컵의 끝부분을 매만지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지민의 손끝이 처연해보였다. 저번에 청첩장 줄 때도 느낀 거지만 꽐라미친년일 때랑은 사람 자체가 다른 것 같다. 진짜 정체가 뭐냐? 너?


“어. 맞아. 그래서 둘이 엄~ 청~ 친하게 지내다가 잠깐 싸우고 멀어졌었는데 지금 보니까.. 화해를 한 것 같네? 맞지이?”


사귀었다가 깨지고 오랜만에 다시 만났구나. 정국은 미영이 어설프게 꾸며낸 말들 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잡아냈다. 지민이 미영을 죽일 듯이 쏘아봤다. 태형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야. 태형이도 5월에 결혼해! 나도 5월에 하고 싶었거든! 부러워 죽겠다.”


결혼까지? 이거 완전 구질구질한 놈들 이구만? 정국은 강한 흥미가 어린 눈으로 지민과 태형을 번갈아봤다.


“5월에 하지 그랬어.”


태형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식장이 그렇게 쉽게 잡히는 줄 아냐? 게다가 좀 있으면 배도 나올 것 같고..”


미영이 우울한 톤으로 중얼거렸다.


“결혼식 어디서 하세요?”

“저 전쟁기념관 웨딩홀에서요. 장인어른이 육군 중령으로 예편하셔서 웨딩홀 잡기는 어렵지 않았어요.”

“너 그럼 그것도 하지? 예도!”


미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은 아까부터 말없이 폰 액정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민씨는 만나는 분 없으시다고 하셨죠?”


정국이 지민의 주의를 끌었다. 찌릿- 지민이 정국을 째려봤다. 아, 존나 취향이다.


“네. 없어요.”


마침 주문한 메뉴들이 나왔다. 정국은 지민 앞으로 맥주를 놓아주면서 지민의 신경을 박박 긁기 시작했다.


“소개팅 하실래요? 제 친구들 중에 괜찮은 애들 많은데”

“아뇨. 괜찮아요.”


뭔 수작이야? 지민이 안면을 굳히고 거절했다. 누가 봐도 정색한 표정이건만 정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짜 괜찮아요. 보여드릴까?”


정국이 카톡을 켜서 친구목록을 쭉 훑었다. 지민은 앞에 놓인 맥주를 반이나 비웠다.


“어때요?”


정국이 웬 가슴을 반이나 드러낸 여자 사진을 지민에게 보여주면서 어떠냐고 물었다.


“제 스타일 아니에요.”

“얘 진짜 예뻐요. 논현동에서 꽃집하고 있고 이번에 저희 부케도 이 친구가-”

“자기 어.. 저기.. 지민이는”

“저 비혼주의자에요.”


지민의 싸늘한 일갈에 테이블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민은 반 남은 맥주를 원샷했다. 계속 도발하는 정국을 멈추기 위해 한 말이지만 막 결혼을 앞둔 예비신랑신부들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싶었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정국만 혼자 신이 났다. 씰룩씰룩 올라가는 입 꼬리를 숨기느라 안면 근육이 경련할 정도였다. 와, 끝내주게 재미있네. 정국에게 지민은 손맛이 좋은 고기였다. 첫 입질이 왔다. 정국은 얼른 지민을 낚아채고 싶어 안달이 났다. 분명 월척일 터였다.


“야. 너 그럼 휴가 낸 거야?”


침묵을 만든 장본인이 침묵을 깼다. 지민이 미영에게 물었다. 미영은 우물쭈물 말을 아끼며 갈릭치즈프라이를 뒤적였다. 지민은 뒷목이 서늘해졌다. 설마, 얘가, 설마..?


“너 일 관뒀어?”

“어? ..으응.”

“미쳤어?!”

“아! 왜 또 소리를 질러!”


지민이 빽 소리 질렀다. 얘가 진짜 돌았나보다. 어떻게 들어간 직장인데 거길 뛰쳐나와? 그렇게 하고 싶다고 못 하면 죽을 것 같다고 3년을 징징거려놓고 애 하나 들어섰다고 바로 관둬? 저 놈이 어떤 놈인 줄 알고 네 인생을 포기해? 돌았다, 김미영. 돌은 게 분명해.


“나도 힘들었단 말이야!”

“힘들면 휴가를 내면되잖아! 너네 출산휴가도 잘 되어있다며!”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럼 뭐가 문젠데!”

“야.. 지민아.”

“미영아. 잠깐만..”


미영과 지민이 내지르는 고함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정국과 태형은 점원을 비롯한 손님들에게 눈짓으로 사과를 하고 각각 지민과 미영을 진정시켰다.


“그냥 힘들다고! 힘들어! 나보다 어린년들한테 선배 소리하는 거 싫고! 모르는 사람한테 욕먹는 것도 싫고! 동기들 남자 자랑하는 거 맞장구 쳐줘야 되는 거! 20대 초반 신입들이랑 얼굴 비교 당해야 하는 거! 오래 서있어서 맨날 다리 퉁퉁 붓고! 꼭두새벽에 나가고! 무박삼일로 태평양 왔다갔다 거리고! 남들 잘 때 일하고, 일할 때 자서 친구들이랑 놀지도 못하는 거! 이런 거 싫어! 다 싫어!”


정국과 태형은 할 말을 잃었다. 정국은 미영이 일을 그만둔다기에 그러라고 했을 뿐이다. 일 그만두고 탱자탱자 놀기만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너 진짜 철없다.”


지민이 목소리는 더 없이 싸늘했다. 미영이 한 번도 듣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미영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네가 뭘 알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무 것도 모르잖아. 속절없이 지민이 야속했다.


“그런 것도 모르고 하겠다고 한 거야? 승무원을?”

“이 정도 일 줄 몰랐어.”

“몰랐던 거 아니지. 알아보려고도 안 했겠지.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도 없을 거야. 넌 내내 허상만 쫓은 거니까.”

“야.”

“넌 그냥 그 직업이 주는 이미지가 좋았던 거야. 무슨 특허제품처럼 승무원은 공인된 미인이다, 몸매가 좋다, 결혼을 잘 한다.. 케이마크인증 쾅쾅 찍혀질 줄 알았던 거지.”


근데 네 옆을 봐. 네 남편 될 사람 어제 나한테 키스했어.


“박지민. 그만해.”


지민을 말린 것은 태형이었다. 상황이 기괴했다. 예비 남편은 가만있는데 왜 지가 나서? 사실 정국은 내심 지민이 더 비난을 퍼부어줬으면 했다. 영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더니 저런 소리도 할 줄 아네?


“너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요즘 외벌이로 살림 꾸리는 거 쉬운 줄 알아?”

“애 낳고 쇼핑몰 준비할거야. 엄마아빠가 도와준댔어.”

“너 이 미친!”


지민은 결국 벌떡 일어났다. 시발? 승무원 퇴직 후 플랜으로 인터넷쇼핑몰이 유행이라도 하고 있는 거냐? 화딱지가 나서 상을 다 뒤엎고 싶었다. 태형이 제발 진정하라면서 지민을 잡아끌어 앉혔다. 진정하게 생겼어? 지금 남편을 비롯해서 쟤 인생이 전부 시궁창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잖아!


“일단 앉아. 앉아서 얘기해.”

“화장실 갈 거야!”


지민은 태형을 뿌리치고 나갔다. 지민이 나가자마자 정국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영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정국에게 어딜 가냐고 물었다.


“내가 가서 지민씨랑 잘 얘기해볼게.”

“자기가 왜! 쟤 존나 막말하잖아. 지금!”


어흐윽. 미영이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정국은 미영을 달래 줄 시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앞에 앉은 태형이 지민을 따라갈까말까 고민하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다 자기 걱정해서 저러는 거야. 내가 말 잘 해볼게.”

“알았어..”

“태형씨도 계세요.”


정국은 일어나려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태형을 말로 내리눌러 앉히고 가게를 나왔다.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세면대를 잡고 분을 삭이고 있는 지민을 발견했다. 지민과 정국은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쳤다. 지민이 놀라기도 전에 정국은 지민에게 달려들어 잡아 뜯듯이 입을 맞췄다. 지민은 산소가 모자란 사람처럼 온 몸을 버둥거리면서 반항했다. 꽤나 격렬했지만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정국의 힘에 댈 것은 아니었다. 쾅! 지민은 화장실 벽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짐승 같은 키스가 이어졌다. 이건 키스가 아니라 습격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이들이 따닥따닥 부딪치고 혀가 거칠게 엉켰다. 허어억, 허어억. 입술에 작은 틈이 생길 때마다 정제되지 않은 신음이 샜다. 지민은 힘을 실은 주먹을 정국의 명치에 꽂아 넣었다. 위력이 강하지 않아도 급소를 맞았으니 움찔이라도 하는 게 정상인데 정국은 요동이 없었다. 으응, 아아.. 기어코 지민의 입에서 흥분에 젖은 신음이 나오게 만들었다. 정국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진한 미소를 지었다. 정국이 지민의 입술을 쪼옥 빨아 키스를 마무리 했다. 둘은 어느 새 청소도구들을 모아놓은 화장실의 마지막 칸 안에 들어와 있었다.


“너 진짜 처돌았구나?”


만취했을 때 클럽 화장실에서도 안 해 본 짓을 멀쩡할 때 사람들 오가는 쇼핑몰의 공공화장실에서 친구 예랑이랑 했다. 지민의 얼굴은 경악에 물들어 있었다.


“아까 거기서 왕왕 짖을 때부터 이러고 싶었어요.”

“비켜.”


정국이 지민의 손목을 잡아 채 벽에 찍어 눌렀다. 지민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니킥으로 꼬추를 까버리려고 했는데 다리 사이로 무릎이 들어와 그것도 여의치 않아졌다. 정국은 굵은 무릎 뼈로 지민의 페니스를 비벼 눌렀다.


“꺼져! 나 소리 지른다?”

“질러 봐요. 누구 손해인지.”

“내가 손해 볼 게 뭐 있는데?”

“엄청 많아 보이는데? 친구 잃지, 어떻게 해보려던 전남친 잃지, 쪽팔리지.”

“어떻게 해보려던 전남친? 돌았냐? 아니거든? 씨발 그리고 난 친구지만 넌 부인이야.”

“난 아쉬운 거 없어요.”


지민의 머리에 진중권 교수의 짤이 떠올랐다.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다는 명언과 함께. 정국이 지민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지민은 파드득 떨면서 정국을 튕겨냈다. 정국은 굴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지민의 목덜미 여기저기에 입술을 갖다 댔다.


“나 좋으라고 일부러 약 올리는 거예요?”

“하지 말라고. 개새끼야.”


지민이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저한테 제압당해 발발 떨면서도 부득부득 대드는 모습은 뒷목이 다 당길 만큼 자극적이었다.


“어떻게 해? 나 좆 터질라 그래요. 여기서 넣긴 좀 그렇고 잠깐만 빨아줄래요?”


정국은 몇 번 지민을 놓치면서 깨달은 게 있다. 얘한테는 일말의 자비도 베풀어선 안 된다. 조금만 여유를 줘도 딴 곳으로 눈을 돌려버리는 기상천외한 물건이다. 기회가 왔을 때, 무조건 밀어붙여서 뭉개버려야 한다. 그게 많이 과격하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방식일지라도 말이다.


“여기서 나가면 너랑 있었던 일 미영이한테 다 말할 거야.”

“나랑 뭔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해요?”

“기억하는 내에서 다 말할 거야.”

“미영이 유산기가 있대.”

“…뭐?”

“그래서 일도 관둔 거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걸?”

“….”

“거기에 너까지 한 시름 더하면 어떻게 될지 뻔하지 않아?”

“….”

“소중한 친구잖아. 똑똑하게 생각해.”

“….”

“그리고 오바 좀 하지 마. 내가 언제 너랑 연애하재?”

“지민아.”

“…!”, “…!”


태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정국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살짝 당황했다.


“박지민. 안에 있어?”


태형은 대답이 없는데도 화장실에서 떠나지 않았다. 태형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끼이익, 끼이익. 태형이 화장실 문을 하나하나 열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지민이 눈으로 정국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 정국은 일단 문을 잠갔다. 문을 잠근다고 다 해결될 게 아니었다. 바닥 틈으로 보이는 발이 네 개였다. 대걸레랑 빗자루 세제 등을 놓는 칸이라 딛고 올라갈 변기도 없었다. 지민의 눈동자가 지진 맞은 것처럼 흔들렸다.


“지민아.”

“…!”


태형의 목소리가 문 앞까지 다가왔을 때, 정국이 지민을 어깨에 들쳐 멨다. 지민은 하마터면 억소리를 낼 뻔했다. 가까스로 비명을 삼키고 정국의 어깨에 짐짝처럼 대롱대롱 매달렸다. 얇은 문을 사이에 두고 태형과 대치했다. 문 틈 사이로 태형의 그림자가 비쳤다. 그림자는 문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심장이 살가죽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정국의 등판에 닿아있는 지민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왜 안 가고 서있는 거야, 대체! 좀 가라! 제발!


“…!”


이 미친 새끼! 정국은 그 와중에 지민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지민은 작은 반항도 할 수가 없었다. 정국의 손이 지민의 엉덩이를 터트릴 것처럼 잡아 쥐었다. 아! 지민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기다린 손가락이 팽팽하게 달라붙은 옷감 위를 거침없이 오갔다. 특히 엉덩이 골 사이를 어루만지면서 지민을 자극했다. 지민은 발기해버리고 말았다. 무력감과 분함 그리고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머리가 팽글팽글 돌았다. 제발, 제발! 지민이 간절히 바라마지 않았을 때 태형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태형이 화장실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국이 지민을 내려주었다. 지민은 내리자마자 정국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적중하진 못했다. 오히려 정국의 손에 손목이 잡혔다. 정국은 낚아 챈 손목을 확 당겨 지민을 제 가까이로 끌어왔다.


“사귀는 거 안 바래.”


진짜 입에서 나오는 족족 개소리다.


“나랑 자자.”

“미친 새끼.”

“많이도 아니고 한두 번만.”

“꺼져.”

“그럼 깨끗하게 손 털게. 그 다음엔 좋은 남편, 좋은 아빠 될게.”

“지금부터 그래 봐.”

“제일 몸값 높을 때 코 꿰어서 가는데 그 정도도 못해줘?”

“니가 싸질러 놓고 왜 나한테 지랄이야.”

“나는 너 못 먹어서 안달 났어.”

“…씨발.”

“친구 결혼 선물 해준다 생각하고. 응?”


정국이 닫았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먼저 칸을 나왔다. 칸 바깥에서 정국이 지민을 향해 짓궂게 웃었다. 쓰레기 싸이코패스 무뢰한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천진한 미소였다. 와꾸 하나는 끝내준다. 정말로.


“지민씨, 우선 카톡 차단부터 풀어요.”

“….”

“그리고 내가 나오라하면 나와. 안 그럼 나도 내가 뭔 짓 할지 몰라.”


정국이 먼저 화장실을 나갔다. 지민은 정국이 나간 자리에서 주저앉아 있다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자리로 돌아갔다. 정국이 뭐라 지껄여놓은 건지는 몰라도 테이블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지민은 내내 너갱이가 빠진 채 앉아있었다.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씨발, 어떻게 해, 진짜 좆 된다. 좆 됐어. 지민은 눈앞에 산재한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태형이 빌지를 들고 일어서는 정국의 신발 앞 코를 유심히 관찰하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아깐 왜 그랬어?”


태형이 차로 지민을 데려다 주는 길이었다. 지민은 내내 창밖을 보며 꼬여버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궁리를 하는 중이었다.


“뭐가?”

“미영이한테 왜 그렇게 말해.”

“걔가 대책 없이 굴잖아.”

“걔도 스물일곱인데 생각이 있겠지.”

“넌 왜 갑자기 시비야?”


지민은 태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형은 인상을 쓰고 있었다. 얘는 또 왜이래?


“남들 인생 멋대로 재단하고 한심해 하지 마. 네가 그 상황 겪어본 거 아니잖아. 미영이라고 너만큼 생각 안 해봤겠어?”

“걘 생각 안 해봤어. 내가 알아.”

“이렇게 말하지도 말라고.”

“왜 그러는데!?”


태형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지민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차가 신호에 걸려서 정차했다. 태형이 지민을 쳐다봤다.


“너 아까 어디 갔다 왔어?”

“..어?”

“아까 화장실 간다고 했었잖아. 화장실에 너 없던데.”


지민은 헙 숨을 멈췄다. 전정국이 말한 거 아니었나? 나 떠보는 건가? 여기서 되는 대로 지껄였다가 전정국이랑 말이라도 다르면 어떻게 해!?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태형의 굳은 얼굴이 앞 차의 방향지시등이 내뿜는 빨간 빛에 물들었다.


“화장실 안 갔어. 밖에서 열 식히는데 마주쳐서 걔가 얘기하자고 그랬어. 그래서 얘기 잘하고 왔고.”

“그래?”


대충 맞나? 이렇게 말한 건가?


“응.”

“알겠어.”


근데 내가 왜 이걸 얘한테 말하고 있지? 무슨 추궁당하는 사람처럼? 어이가 없네? 지민은 뒤늦게 황당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 지적하진 않았다.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눠봐야 자신만 손해일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태형은 네비가 가리키는 동선을 따라 매끄럽게 운전했다. 지민의 원룸까지 이제 3km, 지민은 이 순간만큼은 폭력적으로 차를 모는 민대리가 그리워졌다. 지민은 쇼핑백을 챙기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태형은 내뺄 준비를 하는 지민의 작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나 잡아 둘 명분도 없었고 잡아서 뭔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너 왜 거짓말해? 아까 화장실에 있던 거 아니야? 전정국이랑 한 칸에 있었지? 맞아? 거기서 뭐했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 여기서 내리면 돼.”

“….”


태형이 천천히 속력을 줄였다. 지이잉. 지민의 폰이 진동했다. 지민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아주 짧은 새였지만 태형도 발신자의 이름을 보았다. [민윤기 대리님]. 불현듯 지민을 성수까지 데려줬다던 그 상사가 생각났다. 태형은 일부러 굼뜨게 차를 세웠다. 지이잉지이잉지이잉. 그 사이 진동은 세 번이 넘게 울렸다. 지민은 죽어도 태형 앞에서 전화를 받지 않을 모양이었다. 더 이상 질질 끌 수가 없었다. 마침내 차가 세워졌다. 그 때까지도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나 간다!”

“어. 들어가.”


지민이 차문을 열고 튀어나갔다. 폴짝이라는 의태어가 어울리는 움직임이었다. 지민은 빠르게 뛰어서 태형과의 간격을 늘렸다. 태형은 멀어져 가는 지민의 등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태형은 기어를 바꾸다 말고 지민이 전화 받는 것을 발견했다. 원룸 계단을 오르는 지민의 옆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배어있었다. 스틱을 쥔 태형의 손에 까닭 모를 힘이 들어갔다.

















“근데요. 민대리님 금수저예요?”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운을 띄운 질문이었다. 이렇게 테이블의 모든 시선이 집중될 줄 알았다면 절대 꺼내지 않았을 거야. 지민은 구내식당에서 친한 동료들과 점심을 먹다가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민대리를 발견했다. 민대리도 지민을 발견했다. 민대리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민대리는 주말동안 전화하고 카톡 주고받은 게 거짓말인양 오전 내내 지민을 겁나 무시했다. 일이 바빠서 그런 건지 몰라도 눈 한 번을 마주쳐주지 않았다. 지민은 저만 혼자 민대리를 의식하나 싶어 짜증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다.


“왜?”, “민대리 금수저야?”, “뭔 소리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들 민대리가 궁금했나보다. 사람들이 저마다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민대리는 이런 인물이다. 어떤 엄청난 비밀을 숨긴 거 같고, 저 사람한테는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을 것 같고, 그걸 또 알고 싶고, 무슨 생각을 하고 사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이다. 딱히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민대리를 예의주시했다. 정작 민대리는 물어보면 솔직히 다 답을 해주고 때론 물은 것보다 많은 얘기를 털어놓을 때도 있는 데 말이다.


“아니. 차 좋은 거 타시 길래..”


지민이 말끝을 얼버무렸다. 뒷담까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이 됐다.


“민대리 차 뭐였지?”

“아우디 A8 일걸요? 맞지?”

“네에..”

“어머? 정말? 리스아니에요?”

“요즘 다 리스지. 리스여도 똑같아.”

“뭐가 똑같아. 겉멋이구만.”


진짜 괜히 꺼냈다. 지민은 후회가 막심했다. 남자사원들은 질투어린 목소리로 민대리를 은근히 후려쳤고, 여자사원들은 안 그래도 있던 관심을 흑심으로 바꾸는 게 UHD티브이 마냥 선명하게 보였다.


“민대리 주식하잖아.”

“예?”, “정말?”, “민대리가?”


총무팀 기현에게 모든 이의 이목이 집중됐다. 기현은 주식으로 돈 좀 굴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민대리가 주식을 한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네. 들어보니까 완전 마이다스의 손 그 자체던데.”

“뭐가 어떤데! 얘기 좀 해봐.”


테이블 사람들 모두가 놀리던 숟가락젓가락질을 멈추고 기현의 얘기에 집중했다. 기현은 생각보다 좀 더 격한 주변의 반응에 살짝 기분이 들떴다. 회식 때 주식수익률을 가지고 한탄하는 것은 기현의 고정 레퍼토리였다. 회사 내에 주식하는 사람은 이부장 밖에 없어 말을 해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헌데 저번 회식에선 민대리가 반응했다. 보유종목이랑 얼마를 투자해서 얼마를 벌었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해줬다. 분명 자랑 투는 아니었지만 내용 자체가 엄청났다.


“삼년 전에 삼천만원 가지고 시작했는데 시작하자마자 서울 옥션으로 대박 터뜨리고 그 다음해에 산성앨엔에스로 12배인가 났대요.”

“허어!?”, “헐!”, “12배?!”


사람들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지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재작년 말에 한미약품 엄청났던 거 알죠. 민대리 그때까지 투자한 돈 거기다가 올인해서 돈벼락 맞고 미련 없이 털었대요.”

“어머어머. 한미약품 하한가 여러 번 치지 않았나? 그 후에? 뭐 문제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막 뉴스 나오고 그랬었잖아.”

“맞아요. FDA승인 대기 중이던 약이 개발 중단 돼서.. 아씨.. 그것만 계속 진행됐어도 제가 이 꼴은 안 났을 텐데.. 암튼 민대리는 그전에 턴 거죠. 승부사에요. 승부사.”

“와.. 나 소름 돋았어.”

“그 다음에는 바이로메드로 또 두 배정도 나고.. 지금은 소소하게 몇 종목 굴리고 있다고 했어요. 근데 제가 언뜻 영웅문 어플 봤거든요? 계좌평가액이 15억인가? 저 콤마 위치 잘못 본 줄 알았잖아요.”

“나도 주식할래. 민대리 무슨 종목 보유하고 있는데? 뭐 주식 어떻게 하는 거야? 증권사가서 계좌 트면 돼?”


혼이 쏙 빠지는 얘기였다. 지민은 민대리의 고급 취향과 그동안의 씀씀이가 한 번에 이해됐다. 리얼로 비범한 사람이었구나. 느낌만 그런 게 아니라. 갑자기 오늘 민대리에게 건네 주려했던 톰브라운 셔츠가 민망해졌다. 아, 몰라. 못 입겠으면 발닦개로 쓰라고 하지, 뭐.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추고 민대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었다. 민대리가 식판을 들고 일어서는 게 보였다. 어?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지민은 아직 다 끝내지 못한 식사를 미련 없이 마치고 민대리를 따라 나갔다. 민대리는 계속 폰을 보면서 걸었다.


“대리님!”


민대리가 뒤를 돌아봤다. 반가워하는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저렇게 딱딱한 얼굴로 쳐다볼 줄은 몰랐던지라 지민은 당황했다. 민대리는 대꾸도 없었다. 지민은 당황해서 어, 어.. 말을 더듬었다.


“오늘 끝나고 시간-”

“아, 옷. 옷이랑 가방 못 가져왔어요. 내일 갖다 줄게요.”

“그게 아니라”


지이잉. 민대리의 폰이 진동했다. 액정을 확인한 민대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민씨. 나 지금 바빠서. 미안.”


민대리는 그 말을 끝으로 지민에게서 등을 돌렸다. 지민은 황망해졌다. 뭐지? 뭐야? 이거? 지민은 얼얼한 기분으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서도 어퍼컷을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민대리는 심각한 얼굴로 나타났다. 지민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민대리는 계속 핸드폰을 확인하고 간간히 일을 했다. 지민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이런 상황, 오랜만이었다.


클럽생활 초기, 지민은 순진했다. 밤에 만나는 인연들이 쉴 새 없이 속삭이는 사랑의 밀어들이 진심인줄 알던 시절이 있었다. 짧으면 다음 날 아침, 길면 며칠이었다. 그들은 지민을 떠나갔다. 충분한 설명 없이, 아주 무례한 방식으로, 갑작스럽게. 지민은 상처를 받았고 학습을 했다. 그들을 믿지 말자. 진심 없는 말들에 혹하지 말자. 난 특별하지 않아. 쟤들은 바라는 건 그저 섹스야. 목적을 달성하면 시들해질 유통기한 짧은 호감에 마음 한 자락도 주지말자. 자신을 단련시켰고 효과가 있었다. 지민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근데 잠깐 느슨해졌었나 보다. 미쳤지, 박지민. 이게 다 상황이 좆같이 돌아가서 내가 방심했던 거야. 지민의 발에 책상 아래 고이 놓아둔 톰브라운 쇼핑백이 채였다. 이건 어쩐담? 내가 입을까? 아니, 아니다. 정신도 차릴 겸 극약처방하자. 민대리한테 던져주자. 완전히 쫑 내자. 지민은 사내메신저로 민대리에게 대화를 걸었다. [대리님 드릴 게 있어요. 지금 잠깐 나오실 수 있으세요?]. 민대리는 메신저를 보지도 않았다. 또 전화가 걸려왔나 보다. 민대리가 급하게 사무실에서 뛰쳐나갔다. 지민은 쇼핑백을 들고 민대리를 따라갔다. 민대리는 비상계단 출입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지민의 발걸음 역시 급해졌다.


“대리님!”


민대리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지민을 올려다보았다. 지민은 한달음에 뛰어 내려갔다. 민대리의 표정이 안 좋았다. 그렇게 볼 거 없어. 나도 이것만 전해주고 갈 거야.


“잠깐만 이거-”

“나중에 얘기해. 나 진짜 바빠.”

“아니 그게 아니고”

“네, 네. 알겠습니다. 네. 지금 갈게요.”


민대리가 지민을 무시하고 통화를 계속했다. 지민은 꼭지가 돌았다.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너랑 안 엮이려고 별 지랄을 다했잖아. 근데 네가 건드렸잖아. 네가 들쑤셨잖아! 왜 내가 매달리는 것처럼 이렇게 되는 건데! 상황이!


“야.”

“뭐?”


이게 미쳤나? 민대리는 폰을 붙들고 지민을 쳐다봤다. 폰을 쥔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민대리는 오늘 아침 전 부인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더 당황했다. 지민이 울고 있었다.


“이거 네 꺼야. 버리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나한테 앞으론 다신 말 걸지 마세요.”


지민이 쇼핑백을 던졌다. 민대리의 발밑에 쇼핑백이 떨어졌다. 지민은 휙 등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민대리는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으나 일단 지민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뛰어올라가 지민의 팔목을 붙들었다. 지민이 팔을 쳐냈다. 민대리가 다시 한 번 지민을 붙들었다.


“말 걸지 말라고 했잖아. 내 말은 좆으로도 안 들어?”

“너 왜 그래? 어? 왜 울어?”

“나쁜 새끼, 개새끼, 좆같아. 너.”

“야.”


민대리는 살면서 처음으로 쩔쩔맨다는 표현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민은 입으로 걸은 욕을 토해내면서도 아기처럼 울었다. 연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제가 상처를 입힌 거 같았다. 민대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지민아. 왜 그래? 말을 해 봐.”

“대리님 짜증나니까 이거 놓으시라구요.”

“정말 모르겠어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나 하루 종일 제정신 아니었어. 전 부인이..”


민대리는 말문이 막혔다. 지민에게 할 얘기는 아니었다. 지민한테 아직도 과거에 얽매여 있는 남자로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전 부인이 아침에 사고를 당해서 크게 다쳤대.”

“….”

“가족들이 다 외국에 있어서 내가 어쩔 수 없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


지민은 그제 서야 진정을 하고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 뭔가 오해하고 있나본데 그거 아니야. 알겠지?”

“….”


지민은 고집스럽게 입을 앙다물고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민대리는 애가 탔다.


“내가 어른스럽지 못 했어. 미안. 신경썼어야하는데.”

“….”

“나 지금 가봐야 하거든? 너 이러면 못가, 나.”

“…알았어요.”

“그래. 내가 저녁에 전화할게. 그 때 자세히 얘기하자. 저건 내가 가지고 갈게. 고마워.”


민대리가 지민의 입에 짧게 입 맞췄다. 내팽겨 쳐진 쇼핑백을 집어 들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속이 시끄러워서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환자 상태가 불안정해요. 의식 차린 후로 계속 남편만 찾아요. 빨리 오셔야 될 것 같아요. 그 말들보다 더 걸리는 것이 지민의 눈물이란 게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윤기였다.












오늘 태형에게 만나자고 한 건 순전히 충동이었다. 지민은 외로웠다. 외로움과 공허함에는 익숙해 질대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혼자 있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나 진짜 왜이래? 지민은 퇴근까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민했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태형에게 연락했다.


오늘 보자

오늘?

나오늘신혼집침대들어오는날이라


존나 안 궁금한 얘기 떠벌리고 앉아있다. 지민의 이마에 핏줄이 불쑥 돋았다.


안돼?

몇시

나끝나고바로 6시반?

알았어어디서봐?

강남ㅋㅋ

ㅇㅋ


지민은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평소보다 일찍 퇴근을 했다. 강남에 도착 했을 땐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나좀늦어


태형에게서 온 카톡이었다.


얼마나?

30분?

알써 빨리와


지민이 한 시간이나 태형을 기다려야한다는 소리였지만 그러려니 했다. 지민은 강남 교보로 향했다. 요 몇 년 놀러만 다니느라 책을 멀리했다. 간만에 짬이 났으니 몇 권 사볼까? 지민은 휘적휘적 교보문고를 누비며 이 책 저 책을 들춰보고 마음에 드는 몇 권을 구매했다. 1시간이 금방 갔다. 7시가 다 되었는데도 태형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지민은 일단 교보를 나와서 엔젤리너스로 들어갔다.


어디야? 나 교보타워 엔젤리너스ㅋ


태형은 10분 동안 감감무소식이었다.


개매너


설마 바람맞힌 건가? 화가 난 지민이 먼저 카톡을 했다.


지금가고있어미안

뭐야 언제쯤 도착하는데

7시반쯤?


얘 뭔데 이렇게 당당하지? 한 시간이나 늦는 주제에? 지민은 1시간 30분이나 태형을 기다렸다. 속에서 열불이 확 올라왔다. 전투력이 상승하는 게 느껴졌다. 아냐, 일단 오면 지랄해야겠다. 후, 오늘 기분도 안 좋은데 너 죽었어. 사귈 때에도 태형은 약속시간에 10~20분씩 늦곤 했다. 다시 버릇 나오는 구나.


저 멀리서 태형이 택시에서 내려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뭐야, 차도 안 가져왔어?


“미안. 저녁 먹었어?”

“….”


지민은 태형의 꼴을 보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흐트러진 정장차림이었다. 넥타이가 삐뚤어져있고 셔츠는 잔뜩 구겨져서 깃이 반쯤 솟아있었다. 살짝 보이는 목덜미에 작은 울혈이 맺혀있었다. 태형이 신혼집에서 뭘 하고 온지 딱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지민은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끓는 분노로 태형을 증오하던 때보다 더한 파괴욕이 생겼다. 내가 잠깐 본분을 잊고 있었구나. 얘를 꼬시기로 마음 먹어놓고 너무 안이하게 있었다. 나 진짜 이제 맘대로 할 거야.


“왜 보자고 했어?”

“태형아.”

“어?”


태형은 당황했다. 태형아라니.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응.”

“우리 섹스도 한 번 해봐야할 것 같아.”

“뭐?”


뛰어오느라 불안정해진 숨을 고르던 태형은 일시정지를 누른 것처럼 모든 행동을 멈췄다. 얘가 뭐라고 한 거지? 내가 잘못 들었나?


“네가 그랬잖아. 문제 있는 부분을 되돌아보자고.”

“너 지금 뭔 소리 하는 거야?”

“사실 우리 잠자리에도 문제 많았잖아.”

“이게 무슨 개헛소리야.”


태형이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졌다. 진짜 제대로 열 받았다는 증거다. 말려들어라. 말려들어, 김태형.


“나 너랑 하면서 한 번도 좋았던 적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작작해. 네가 내 아래에서 앙앙댄 게 얼만데.”

“진짜야. 그거 다 연기 한 거야. 애인 앞에서 목석처럼 누워있을 순 없잖아. 예의가 있지.”

“….”


태형을 치솟아 오르는 분노로 눈앞이 아찔할 정도였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한테서 사실 넌 주워온 아이야! 라는 말을 들어도 이것보단 덜 황당하고 덜 화날 것 같았다. 뻔뻔하게 입을 터는 박지민이 자기가 아는 박지민이 맞는 지도 의심스러웠다. 어떻게 저런 소릴 할 수 있지? 쟤 누구야?


“나 너한테 질린 거에 그 부분이 되게 커.”

“씨발. 야. 나와.”

“왜? 할거야?”

“일단 나와서 얘기해. 여기 사람 많으니까.”

“목적지 정하고 나가.”

“일단 나오라고.”

“후회 없이 해보자며. 태형아.”

“박지민.”

“난 그게 제일 후회스럽다. 어쩔래?”

“….”


너랑 섹스한 게 제일 후회스러워. 태형은 부들부들 떨면서 지민을 노려봤다. 지민도 지지 않고 태형과 눈싸움을 했다. 내가 아직도 너한테 쪽도 못 쓰고 깨갱하는 박지민 같냐? 나도 이제 이 정도 함정은 팔 수 있는 급이 됐다 이거야.


“가.”

“….”

“떡치러 가자고. 일어나.”


태형이 지민이 드리운 미끼를 덥썩 물었다.















둘은 샤워가운을 입고 마주앉아 있었다. 웃긴 상황이었다. 호기롭게 호텔 방을 잡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둘 다 씻는 사이에 현타가 왔다. 지민도, 태형도 서로에게 선뜻 손을 뻗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객기가 만들어낸 참사였다. 특히 태형은 자꾸만 유나가 떠올라 죄책감에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 나가면 된다. 지금 나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나 다름없어. 박지민한테 무시야 받겠지만 어차피 이 일이 끝나면 지민은 다시 전 애인이 되어버린다. 현재의 사람한테 두고두고 미안할 일 만들지 말자. 태형이 결심했다.


“나 안 되겠다.”

“….”

“못하겠어. 미안.”

“…어, 그래.”

“후. 미안하다. 그 부분은 빼고 다시 생각해보자.”

“그래….”


지민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태형과 알몸으로 마주하고 있으니 다시 스물한 살 박지민으로 돌아간 착각이 들었다. 태형과의 섹스가 모든 것을 바꾸리란 예감이 들었다. 돌아올 수 없는 강 앞에 몰린 위태로움, 절박함, 불안함.. 지민은 그 모든 감정을 복합적으로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태형이 관두자고 했을 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태형 앞에서 표정관리가 안 되었다. 그래서 화장실로 대피했다. 화장실 거울에 스물일곱의 박지민이 비쳤다. 닳고 닳아버린, 그 시절로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금 스물일곱 지민은 스물하나의 지민한테 속절없이 당했다. 이게 무슨 기분인지, 어떤 상황인지 따져볼 수도 없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진정하자. 진정해. 진정하고 나가서 집에 가면 되는 거야. 너무 성급했어. 지민은 샤워기를 틀었다. 이 적막한 고요 속에서 벽을 타고 넘어오는 태형의 숨소리를 견딜 수 없었으므로.


지이잉


침대에 앉아 멍을 때리던 태형은 진동소리에 정신이 깨어났다. 지민의 휴대폰이었다. 가만 놔둘까 하다가 불쑥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태형이 폰 쪽으로 다가갔다. [민윤기 대리님]. 그 때 그 남자였다. 지이잉지이잉지이잉. 폰은 한참 진동하다가 부재중으로 넘어갔다. 액정화면에 그 남자가 보낸 카톡이 떴다.


어디야? 전화 받아봐


별 거 아닌 내용이 왜 그렇게 애틋하게 느껴졌을까? 태형의 미간이 구겨졌다. 태형은 지민의 폰 홀드를 풀어보려 했지만 지문으로 잠겨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지난 주말, 지민은 이 남자의 폰으로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태형은 이 남자의 번호를 알고 있다. 카톡에 친구가 추가되었다. 태형은 프로필을 확인했다.


“…아.”


지민과 함께 골랐던 톰브라운 셔츠. 그 셔츠를 입은 남자의 프로필. 목 아래로만 나온 사진이었지만 그 남자가 확실했고, 그 셔츠가 맞았다. 태형은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 잡혔다. 내내 피하고 있던 진실에게 발목이 잡힌 기분이었다. 그 때, 욕실에서 지민이 나왔다.


지민은 찬물 세수로 흥건해진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면서 나왔다. 태형이 폰을 손에 든 채로 욕실 앞에 서 있었다. 태형은 지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표정이.. 이상했다. 왜냐고 물으려고 했다.


“읍!”


태형이 지민에게 달려들기 전까지는 그러려고 했다. 태형은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막의 조난자처럼 지민의 입술에 달려들었다. 버둥거리는 지민의 얼굴을 붙들어 못 움직이게 하고 익숙한 듯 낯선 지민의 입술을 탐했다. 지민은 태형에게 밀려 허둥지둥대다가 이내 태형의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태형이 지민을 들어올렸다. 지민은 태형에게 들려가면서 끊임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태형이 지민을 침대 위로 내던졌다. 지민은 아까 서점에서 보았던 책에 나온 문구를 떠올렸다.



우리는 모두 다 저 마다의 표면장력을 가지고 살아간다. 변화하기 위해선 이 힘을 넘어서야만 한다. 변화를 위한 결심이나 행동이 거창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아주 사소한 사건들이 우리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그러므로 언제나 잔을 넘치게 하는 것은 마지막 한 방울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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