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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6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X다 上


Jazmine Sullivan - Bust Your Windows








사랑은 처음부터 민대리가 좋았다.


민대리는 사랑의 이상형 조건을 맞춤복처럼 소화해내는 남자였다. 사랑이 살아온 30년 세월을 되돌아 볼 때, ‘예민한 듯 무심하면서 섹시한 남자’라는 모순적인 매력을 소유한 인간은 리버 피닉스를 제외하고 민대리가 유일했다. 전자는 망자이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지만 후자인 민대리는 하루 8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직장동료다. 마음만 먹으면 꼬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민대리는 철벽이 장난 아니었다. 사랑이 아무리 들이대도 옴짝달싹 하지 않았다. 사랑뿐이랴? 다른 여직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여자들 보는 눈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민대리는 여직원들이 던지는 추파를 반사판마냥 팅팅 튕겨 내기 일쑤였다. 그래서 민대리가 이혼남이란 걸 알았을 때, 사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남자는 흠이 좀 있어야 했다. 이제 얼추 게임이 되겠네. 그나저나 어떻게 공략한담? 고심하던 차에 인사팀 박지민이 민대리와 강남에서 노닥거리는 걸 목격했다. 의외의 조합이었다. 둘은 꽤 친해보였다. 사랑의 머리에 그럴싸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래, 박지민을 이용하자! 회식 자리에서 창피를 무릅쓰고 지민에게 민대리와의 술자리를 만들어 달라 부탁했다. 지민은 별로 내켜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튿날,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민대리와 딱 마주쳤다. 사랑은 사흘 만에 본 민대리가 너무 반가워 저도 모르게 지민과 나눴던 이야기를 떠벌였다. 민대리는 어쩐지 조금 굳은 얼굴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사랑은 민대리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우리끼리 약속을 잡아서 화났나? 사랑은 자리에 도착해서도 안절부절 못하며 민대리의 눈치를 살폈다. 지민이 9시가 지나서 사무실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어제 집에 안 들어가고 뭘 한 건지 흐트러진 차림에 머리는 산발이고 몸에선 미미하게 술 냄새가 났다. 뒤이어 화장실에 갔던 민대리가 따라 들어왔다. 민대리는 자리에 앉아서 지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니, 노려봤다. 민대리님 왜 저러지? 지민씨한테 화났나 봐. 아씨! 어떻게 해!? 내가 괜히 주책 떨어서 일을 만든 것 같아. 사랑은 둘의 동정을 살폈다. 책상서랍을 뒤지던 지민이 우당탕 일어나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지민의 뒤꽁무니를 쫓아 돌아갔던 민대리의 얼굴이 다시 모니터 쪽으로 향했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탁! 마우스 휠을 신경질적으로 내리던 민대리가 별안간 마우스를 집어던지듯이 내팽겨 치고 사무실을 나갔다. 사랑은 잔뜩 쫄아 몇 분 동안 초조하게 사무실의 문만 응시했다. 수 분이 지나고 민대리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민대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상태로 재등장해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얘기가 잘 된 건가 싶었다. 지민이 너갱이가 한참 빠진 몰골을 하고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차장이 지민을 불렀다. 지민은 창백하게 핏기가 가신 얼굴로 차장을 쳐다봤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지민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걸 직감했다. 사랑이 의자를 뒤로 밀면서 일어났을 때, 지민의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갑작스럽게 졸도한 지민을 두고 사무실은 약 3초간 정적이 흘렀다. 자리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온 건 모든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던 사랑이다. 사랑이 지민에게 달려가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어떻게 하냐고 징징대는 여사원들과 허둥지둥 핸드폰을 꺼내는 남사원들을 제치고 민대리가 등장했다. 민대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민을 안아 올렸다. 사랑은 민대리의 뒤를 쫓았다.


「대리님! 여기요!」


비상계단으로 향하는 민대리를 사랑이 만류했다. 민대리가 거세게 몸을 돌리면서 자신의 팔뚝을 붙든 사랑을 노려봤다. 서슬 퍼런 눈빛에 당황한 사랑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지민은 민대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축 늘어져 팔만 달랑거리고 있었다.


「에, 엘리베이터 잡았어요. 2층에 사내의무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민대리는 사랑을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탔다. 사랑도 민대리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탔다. 지민을 안고 있느라 쓸 손이 없는 민대리 대신 사랑이 2층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누르는 손이 달달 떨렸다. 엘리베이터가 하강하는 동안 흘긋 민대리를 훔쳐봤다. 민대리는 품안에 지민을 애끓는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사랑의 존재를 인식조차 못 하는 사람처럼 온 신경을 지민에게 쏟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민대리가 내렸다. 사랑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닫힐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해.」


사랑의 입에서 기어코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뭐야, 저 둘.」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6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X다 上













“너 같은 애 처음 봐.”


지민은 사내의무실에서도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의무실이라고는 하나 페이닥터 한명과 기간제 간호사 한 명이 상주하고 있을 뿐이라 지민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응급처치가 다였다. 결국 119를 불러 근처 종합병원의 응급실로 지민을 실어 날랐다. 응급실에서 CT촬영과 피검사를 했다. 높은 혈중 알콜 농도와 수축기 혈압이 90mmHg 이하인 점만 빼면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소견이 나왔다. 의사는 지민의 상태를 저혈압 쇼크라고 진단했다. 지민은 링거를 꼽고 두 시간동안 쿨쿨 잤다. 도롱도롱 코까지 고는 지민 옆에서 민대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마침내 지민이 깨어났을 때, 민대리가 제일 처음 꺼낸 말이 저거다. 나 살면서 너 같은 애 처음 봐. 지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민대리를 쳐다봤다.


“너 같은 애 처음 본다고.”


분노에 찬 음성과 달리 민대리의 얼굴은 전에 없이 헬쓱 했다.


“너 진짜 별로야.”

“..예?”

“칠렐레팔렐레 아무한테나 끼 떨고 다녀.”

“….”

“오는 남자 안 막고 가는 남자 안 잡아.”

“….”

“지 감정에 대한 확신 없어. 그렇다고 남의 감정을 존중하냐하면 그것도 아니야.”

“….”

“겁 많고, 의심 많고, 그런 주제에 깊게 생각하는 건 싫어해.”

“….”

“충동적이야.”

“….”

“변덕이 심하고”

“….”

“약하기까지 해.”


지민은 자신을 비난하는 소리를 듣고도 가만있었다. 이쯤 되면 빽 소리를 지를 타이밍인데 용케 잘 참는다 싶었다. 혹시 다시 기절하려나? 민대리가 덜컥 불안해졌을 때,


“그래도 저 좋아하죠?”


지민이 또랑또랑한 눈으로 민대리를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닌, 자신이 드디어 확신하게 된 어떤 사실을 상대방에게 주지시켜주기 위한 물음이었다. 대리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한테 끌리죠? 민대리의 창백한 얼굴에 열이 확 몰렸다. 민대리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민으로부터 등을 돌린 민대리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민대리는 당황스러웠다. 나이를 서른두개나 처먹고 이게 무슨 추태인지 모르겠다. 사춘기 풋사랑을 할 때도 이런 증상은 없었다. 아, 늙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민대리가 고개를 돌려 지민을 쳐다봤다.


“왜요?”


상대가 너라서?


“좀 살만하면 이제 퇴원하자.”


민대리는 빠르게 퇴원수속을 마쳤다. 링거 한 통을 다 비우고도 영 맥을 못 추는 지민을 품에 안다시피 부축해 차 조수석에 태웠다. 뒷좌석에는 지민의 핸드폰과 수트케이스가 마구잡이로 던져져 있었다. 회사는 어쩐 거냐, 짐은 언제 가져 왔냐, 진료비는 누가 낸 거냐 등등.. 지민은 하고 싶은 질문들이 많았지만 기운이 딸려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한참 자고 난 후인데도 눈꺼풀이 무거웠다. 민대리의 차가 주차장을 벗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수마에 점령당했다.


“우음..”

“일어나. 거의 다 왔어.”


지민은 자신의 허벅지를 살짝 쥐었다놓는 민대리의 손길을 느꼈다. 잠이 덜 깨 어룽어룽한 시야에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민대리의 옆모습이 보였다.


“..저 얼마나 잤어요?”

“세 시간.”

“네?!”


이게 무슨 말이냐? 지민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전 본 적이 없는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빽빽한 도시의 건물들이 아닌 우거진 녹음이 지민을 반겼다. 미세먼지에 뒤덮인 회색하늘 대신에 푸른 창공이 자리하고 있었다. 도로가 지나치게 한산했다. 민대리의 옆모습 뒤로 첩첩의 산들이 휙휙 지나갔다. 주마간산이 따로 없었다.


“여, 여기가 어디?”

“삼척이야.”

“삼처억? 강원도 삼척?!”

“응.”

“왜, 왜?”


당황한 지민은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민대리는 동요가 없었다. 지민이 말을 더듬건 말건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지민의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설마.. 설마.. 이대로 이름 모를 야산에 나를 묻어버리려는 건가? 그동안 내가 좀 짜증나게 했기로 소니.. 설마..? 민대리가 곁눈질로 흘끗 지민을 쳐다봤다. 지민은 놀라서 꾹! 딸꾹질을 했다. 민대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또, 또, 또 제멋대로 소설 쓰고 있지.”

“사, 삼척에는 왜..”

“친구가 사슴농장을 해.”

“..예?”

“너 저혈압 쇼크 말이야. 난 남자가 저혈압으로 졸도하는 거 듣도 보도 못 했어. 초기 임산부들만 가끔 겪는 증상이잖아.”

“그, 그래요?”


사실 지민은 어렸을 적부터 기립성 저혈압과 빈혈을 달고 살아왔다. 증세가 심할 때는 스스로 철분주사를 맞으러 갈 정도니 자신의 지병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결국에 기가 허하고 피가 모자라다는 건데 그럴 땐 녹혈이 직빵이야.”

“녹혈?!”


사슴피를 말하는 건가?!


“어. 이제 금방 도착한다. 내릴 준비해.”

“지금 나한테 사슴피를 먹이겠다고 강원도 삼척까지?”


지민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대리의 차는 굽이 길을 거침없이 나아갔다. 곧 [산아래 사슴농장]이란 글자가 프린트된 형광초록색 현수막이 보였다.


산아래 사슴농장
녹혈, 녹용, 녹중탕, 장뇌삼 판매


지민의 안면이 공포로 물들었다. 진짜 사슴농장인 거야, 진짜로! 어렸을 적 집안 어른들은 허약한 지민에게 보양식을 먹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특히 외할머니가 전국팔도에서 공수해온 괴식들을 지민에게 먹으라며 드밀었었는데 그런 것들을 억지로 꾸역꾸역 집어넣은 기억들 때문일까? 지민은 보양식이라면 질색을 했다. 근데 사슴농장이라니. 벌써부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저, 저 대리님 저 그런 거 못 먹-”

“저기 사슴 있다. 사슴.”

“악!”


농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전방에 사슴 무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지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민대리의 차는 농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주택 앞마당에 섰다. 시골 냄새나는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신식 건물이었다. 얼핏 예쁜 펜션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슴피를 짜고 녹용을 채취하는 농장 한 가운데에 관광목적의 펜션이 있을 리가 만무했지만 어쨌든 보기에는 그래보였다. 민대리가 차를 주차하자마자 주택 현관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형!”


친구라더니 남자는 민대리를 형이라 불렀다. 저 남자가 이 농장의 주인인가 보다. 보통 이런 농장은 중년의 아저씨들이 운영하지 않나? 남자는 자신의 또래 같았다. 생긴 것도 말쑥하고 키도 훤칠해 이런 첩첩산중에서 사슴을 길러 파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가로수 길에서 편집샵을 운영하거나 신촌에서 크롬하츠 같은 악세사리를 파는 쪽이 더 잘 어울려 보이는 남자였다. 민대리는 남자를 김남준이라 소개했다. 대학교 후배란다. 지민은 민대리의 등 뒤에 비껴 숨어서 남준에게 어색하게 목례했다. 지민에게 마주 인사하는 남준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 있었다. 민대리가 슬쩍 남준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지민은 기분이 상했다. 사람 면전에 대고 둘이 속닥대는 거, 비매너잖아!


“저혈압은 약도 없어요. 그저 꾸준하게 체력관리하고 몸에 좋은 음식 많이 먹는 게 최고예요. 저희 누나도 임신 때 고생했는데 녹혈 먹고 많이 나아졌어요. 생간이나 선지도 괜찮지만 그래도 녹혈만 못하죠.”


남준은 경쾌한 말투로 무시무시한 소리를 지껄였다. 남준이 앞장서서 민대리와 지민을 어딘가로 안내했다. 혼이 쏙 빠져 몇 걸음 옮기던 지민은 저 멀리 보이는 철조망의 존재에 기겁했다. 지민이 더 이상 따라가지 않으려고 발을 버티고 섰다.


“어, 어디가요?”

“사슴 보러.”


보러만 가는 거 아니잖아! 나한테 사슴피를 먹일 속셈이잖아! 지민은 제일 선두에서 자신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남준과 인상을 찡그린 민대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머리가 아찔했다. 다시 기절할 것 같았다.


“저, 저 진짜 못 먹어요.”

“에이.. 지민씨 어린애들도 다 먹는 거예요.”


남준이 유들유들하게 웃으면서 지민을 달랬다. 사슴 목을 따는데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나? 사이코패쓰 아니야? 민대리가 지민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지민은 힘에 밀려 질질 끌려갔다. 이내 사슴들이 갇혀있는 축사가 나왔다. 제일 처음으로 보인 건 몸집이 지민만한 엘크였다.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피하지 않고 쒸익쒸익 거리는 게 무서웠다. 엘크의 축사 옆에는 등에 하얀 점들을 콕콕 박은 꽃사슴 무리가 있었다. 몸집이 작고 생긴 것도 너무 앙증맞았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건지 지민 무리가 다가서자 폴짝폴짝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남준은 거침없이 축사로 들어가서 뿔이 하늘로 치솟아 잇는 꽃사슴 한 마리를 몰고 나왔다. 지민은 차마 그 광경을 눈뜨고 보지 못했다. 지민이 으아악 비명을 지르면서 민대리의 품에 안겼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나 환자라고! 저런 자극적인 거 보면 안 된단 말이야!


“주, 죽이는 거예요? 저 때문에?”

“뭘 죽여. 뿔만 자르는 거야.”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지민은 귀를 막고 민대리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민대리는 남준이 녹용을 채취하는 모습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보통은 성인 남자 두세 명이 달라붙어 하는 일이라고 했다. 남준은 금세 녹용 한 사발을 채취해 민대리에게 건넸다. 하얀 사기그릇 가득 채도가 높은 시뻘건 피가 담겨있었다. 민대리는 바닥에 놓인 까스활명수 박스에서 활명수 한 병을 꺼내어 사발에 콸콸 쏟아 부었다. 지민은 민대리에게 안겨있던 자세 그대로 오들오들 떨면서 민대리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민대리가 지민에게 사발을 건넸다.


“쭉 들이켜. 쉬었다가 마시면 더 못 마신다?”

“아, 도저히.. 도저히..”

“이거 굳으면 역해서 못 먹어. 어차피 넌 마시게 될 거야. 내가 이걸 먹이려고 널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데 공치고 돌아가겠어?”


또 나왔다. 묘하게 강압적인 태도. 배려해주는 듯 지 맘대로 하고 무심한 것처럼 굴지만 의외로 집착이 쩐다. 지민은 민대리의 특성을 파악해가고 있었다. 민대리의 말대로 어차피 자신은 이걸 먹게 될 거다. 지민은 눈을 꼭 감았다. 숨을 참고 벌컥벌컥 사발을 들이켰다. 다행히 활명수의 맛이 강해 피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민이 빈 사발을 민대리에게 건넸다. 민대리는 쓴 한약을 먹은 어린 아이처럼 울상을 짓고 있는 지민에게 다가가 사탕대신에 뽀뽀를 줬다. 놀란 건 지민뿐이었다. 남준은 민대리가 지민에게 주둥이를 내미는 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했다. 아, 저 사람.. 다 아는 구나.


“녹용 두 박스 좀 부탁할게. 카톡으로 가격이랑 계좌번호 좀 보내줘.”

“알았어. 밥 먹고 갈 거지?”


민대리는 대답하기 전에 지민을 쳐다봤다.


“어. 근데 옷 좀 빌려줄 수 있어? 쟤 편한 걸로 갈아입혀야 할 것 같아서.”

“당연하지. 오늘 저녁은 사슴고기다.”


남준이 지민을 보며 짓궂게 웃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민대리와 남준에게 휩쓸려 얼레벌레 하다 보니 어느새 자신은 남준의 후드티와 트레이닝 바지를 빌려 입은 꼴을 하고 식탁 앞에 앉아있었다. 남준은 보기완 다른 야무진 손길로 밑반찬을 꺼내고 자이글을 세팅해 그 위에 두툼한 삼겹살을 올렸다. 사슴고기 운운했던 것은 장난이었나 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민대리와 남준이 회포를 푸는 동안 지민은 묵묵히 쌈을 만들어 우걱우걱 씹었다. 아까는 세상 기운 없어 죽고만 싶었는데 녹혈 때문인지 뭔지 갑자기 식욕이 확 돌았다. 민대리는 운전대를 잡아야한다는 이유로 남준이 권하는 반주를 사양했다. 밥을 반 공기 밖에 비우지 않은 민대리가 담배를 피고 온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민은 남준과 단 둘이 있는 상황이 어색해 다 식은 고기를 입에 왕창 집어넣었다.


“윤기 형이랑 만난 지는 얼마나 됐어요?”

“큭!”


하마터면 씹던 걸 남준의 얼굴에 뱉을 뻔 했다. 이 사람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민대리랑 나랑.. 만나?


“그런 거 아닌데요.”

“응? 무슨 말이야?”

“사귀는 거 아닌데..”

“어? 진짜?”

“네.”


남준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민대리가 아까 귓속말로 뭐라 한 걸까?


“그럼 윤기 형이랑 사귀는 거 재고해 봐요.”

“네?”

“이런 말해도 되나? 지민씨 윤기 형이랑 어울리는 타입이 아니거든.”


..? 다 지껄여놓고 뭘 이런 말해도 되나야? 지민은 확 짜증이 올라왔다.


“윤기 형은 차분하고 순종적인 사람 만나야 해요. 지민씨처럼 통통 튀는 사람은.. 아무래도 형을 자극하죠.”

“저랑 뭔 상관인데요. 아무사이 아니라니까요?”

“윤기 형, 자신이 상대방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면 화를 좀 많이 내는 편이지 않아요? 지민씨도 알 것 같은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남준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지민은 불현 듯 민대리의 집 안에 설치되어 있던 잠금장치와 오늘 아침에 민대리가 제게 했던 행동이 떠올랐다. 삽시간에 찜찜해지는 기분을 억지로 환기시켰다. 뭐! 나랑 민대리랑 뭐! 진지하게 연애할 것도 아닌데 뭐!


“새파란 불꽃같은 남자예요. 겉보기에는 서늘해 보이지만 다른 사람보다 배는 뜨거우니 조심해요. 섣불리 손댔다가 데이지 말구.”

“경고예요? 충고예요?”

“둘이 다른 점이 있나요?”

“당연히 다르죠. 경고는 하지 말라는 거고 충고는 하라는 건데. 글 쓰신다는 분이 왜 그 차이를 몰라?”


남준의 또 다른 직업은 소설가랬다.


“걱정이라고 해두죠.”


남준은 지민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비밀스런 미소를 지었다. 걱정이라고 해두죠오? 그렇게 은근하게 말하면 내가 물어볼 줄 알아?! 어?!


“왜, 왜 걱정되는 데여!!!!”

“왁. 깜짝아.”


지민은 물어보고 말았다. 남준을 잔에 맥주를 따르다말고 기겁해 지민을 쳐다봤다. 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씩씩대고 있었다.


“왜, 왜!”

“저기.. 진정해봐..”

“남준씨 민대리님 좋아하져!? 그래서 어깃장 놓는 거죠!?”

“아니?”

“그럼 왜 그러는 데여! 왜!”

“윤기 형 듣겠어!”

“으아악!”


지민은 안 그래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민대리가 아니더라도 해결해야할 문제가 산더미였다. 거기에 민대리까지 한 짐을 더한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지민이 의자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미쳤어? 갑자기 왜 울어?”

“힘들어 죽겠어요.. 날 좀 가만 놔둬.”


남준이 지민 가까이 엉덩이를 붙였다. 두루마리 휴지를 손에 돌돌 말아 지민의 얼굴께로 가져갔다. 지민은 싫다고 남준의 손을 밀어냈다. 남준은 지민의 거부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휴지를 드밀었다. 지민과 남준은 힘 싸움을 했다. 씨발?? 싫다는데 왜 이래?! 지민이 앙칼지게 남준을 노려봤다. 둘의 시선이 엉켰다.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동작 그만.”


민대리가 주머니에 손을 낀 자세로 들어와 둘을 저지했다.


“둘이 지금 뭐해?”


남준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지민으로부터 떨어졌다. 민대리는 원래 앉아있던 자리가 아닌 지민의 옆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훌쩍훌쩍 눈물을 짜는 지민을 보니 골이 빠개질 것 같았다.


“넌 진짜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되는 구나.. 앞으로는 화장실도 같이 가야겠다. 어?”

“제가 뭘여! 으어!”

“뭘 잘했다고 울어! 뚝 그치지 못해!?”


남준이 자신도 담배를 피고 오겠다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저 사람이 이상한 소리했단 말이야!”

“너 말이 짧다?”

“니두 짧잖아!”

“뭔 소리를 했는데? 뭔 소리 길래 둘이 키스하기 1초 전 자세로 얼굴을 맞대고 있어? 나도 좀 배우자. 얘기 해봐.”

“됐어요..”


민대리는 잠깐 지민의 목을 조르고 싶단 생각을 했다. 너 일부러 이러냐? 일부러 내 인내심 테스트 하는 거야?


“다 먹었음 일어나. 집에 가게.”

“힘들어어..”


한바탕 수분을 빼내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진 지민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거부했다.


“일어나!”


지민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대리는 신경질적인 손길로 짐을 챙겨서 남준의 집을 나왔다. 마당에서 담배를 피던 남준이 장초를 비벼 끄고 민대리와 지민에게 달려왔다.


“가, 가게?”

“저녁 고맙다. 옷은 택배로 보낼게.”

“형.”

“연락해.”


민대리가 단호히 차문을 닫았다. 지민은 입술을 댓 발 내밀고 조수석에서 구겨졌다. 민대리는 비포장도로를 카레이서처럼 질주했다. 엉덩이가 3초에 한번 꼴로 들썩거렸다. 차창 밖에는 흙먼지가 무섭게 피어올랐다. 지금 화풀이하는 거 맞지? 지민은 속이 울렁거렸다.


“대, 대리님 잠시만.. 저 토.. 토할 것..”


차가 급정거를 했다. 지민은 바로 뛰쳐나가 풀숲에 먹은 것은 게워냈다. 오늘 하루 동안 졸도하고, 울고, 토하고.. 이러다 급사하는 거 아닌가? 상사가 이런 식으로 괴롭혀서 죽으면 산재처리가 되려나? 민대리가 지민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지민이 우엑우엑 속에 있던 것을 다 쏟고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민대리는 차에서 생수병을 꺼내와 지민에게 건넸다. 지민은 물로 입을 헹구고 빈 병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민대리가 지민 앞에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왜 심통 난 거야? 화낼 사람은 나 아냐?”

“대리님이 왜 화내요? 내가 여기 오자 그랬어? 대리님이 마음대로 데리고 왔잖아요. 맘대로 데리고 와서! 먹기 싫다는 사슴피 마시게 하고! 듣고 싶지도 않은 타입 얘기 듣게 만들고!”

“..타입? 뭔 타입?”

“아까 그 사람이 그랬어! 대리님한테는 차분한 타입이 제격이라 나랑은 안 어울린다고! 날더러 대리님을 감당할 수 있다느니 없다느니!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왜 김칫국들이에요?”

“남준이가?”

“네!”

“아아..”


민대리가 영구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그건 널 걱정해서 한 말일거야. 남준이가 네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이건 또 뭔 소리래? 민대리는 폭 한숨을 쉬었다.


“나 예전에 남준이 친구랑 동거 했었거든.”

“예에?”


왓???????????


“걔가 좀.. 너처럼 놀기 좋아하고 팔랑대는 스타일이었어. 하도 밤에 싸돌아다니니까”

“….”

“내가 못 나가게.. 그러니까 음.”

“….”

“가둬놓은 거지.”

“….”

“….”

“얼마나요?”

“두.. 달?”

“..범죄 아닌가요?”

“이미 끝난 일이야. 잘 해결됐어.”


..뭐가? 뭐가 잘 해결되었다는 거야..? 고소라도 당했던 건가..?


“그 뒤로 망상장애 비슷한 게 생겼어. 집 안에 달려있는 도어락도..”


이렇게 자신 없는 말투의 민대리는 처음 본다. 그래서 더 쎄 했다.


“한번 그렇게 호되게 당한 후로는 사람을 깊게 사귀지 않아. 적당히 어울리다 헤어지고.. 감정 없이 섹스하고.. 갑자기 연락 뚝 끊겨도 이상하지 않은 일회용들만 만났어. 그걸 남준이가 다 목격했고. 지난 연애 때문에 고장 난 건 너 뿐만이 아냐. 나도, 남준이도, 다른 사람들도 연애를 마치면 다 어느 정도 망가지고 비틀어져. 그냥 아닌 척 하고 살아가는 거지. 그러니까 너, 절대 열등하거나 문제 있는 거 아니다? 이제 쓸데없는 자격지심은 넣어둬.”


사귀자는 소릴 밥 먹자는 말 만큼이나 쉽게 뱉던 민대리가 떠올랐다. 요즘 시대에 좋아해서 사귀는 사람이 어딨냐던 냉소적인 대사와 함께. 나 하고도 딱 그 정도의 관계를 맺으려 했던 거구나. 뒤늦게 탈력감이 몰려 왔다. 피로와 공허가 온 몸을 덮쳤다.


“남준씨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아요. 어차피 나도 그런 일회용품들 중 하나인데.”

“..남준인 통찰력이 뛰어나. 나를 가까이서 오래 봐왔고 그래서”


민대리가 지민의 말허리를 뚝 끊고 들어왔다. 민대리는 굽혔던 무릎을 폈다. 지민의 시선이 민대리를 따라 움직였다. 올려다 본 민대리는.. 놀랍게도 쑥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민대리가 검지로 볼을 긁적이면서 말했다.


“넌 이제까지완 다르다는 걸 눈치챘나봐.”













민대리의 인상적인 고백을 들은 지민은 고심 끝에 꼬인 상황을 정리하고 민대리와 진지한 연애를 시작하기로 했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그 상태로 24시간을 내리 잤기 때문이다. 겨우 정신을 차린 게 토요일 오후 7시였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르르쾅쾅! 천둥도 쳤다. 지민은 침대에서 일어나 비척비척 부엌으로 향했다. 배.. 배고파 뒤지겠어.. 당이 떨어져 달달 떨리는 손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먹을 것은커녕 물도 없었다. 아, 이번 달에 꼭 정수기 렌탈 신청하려했는데 또 까먹었다. 지민은 냉장고 한 가운데에 휑덩그라니 놓여있는 입구가 반쯤 열린 우유 곽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장렬하게 우유를 뿜었다. 우유는 얼마나 오래 방치된 건지 상한 것도 모자라 요거트가 되기 직전 상태로 몽글몽글 고체화 되어있었다. 우유를 몽땅 쏟아버리면서 문득 서러워졌다. 빗물이라도 받아먹어야 하나? 독거노인이 따로 없구나.. 지민이 냉장고에 붙은 전단지 책을 넘기며 보쌈을 먹을까, 피자를 먹을까 고민하던 때였다.


지이잉지이잉


24시간 동안 잊고 있던 폰이 제 존재를 알렸다.


지이잉지이잉


간간히 민대리와 생존신고격으로 통화한 기억은 있지만 뭐라고 지껄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지이잉지이잉


지민이 사경을 헤매는 동안 김태형에게선 한통의 연락도 없었다. 이제 정말 끝인 건가? 개자식. 결자해지? 결자해지 좋아하시네. 이게 클럽 원나잇이랑 다를 게 뭐가 있냐 이거야. 원나잇은 뒤끝이 없기라도 하지. 전 남친이랑.. 구질구질하다. 구질구질해. 지민은 우울을 씹으면서 액정을 확인했다. 아! 씨발! [미영이 바깥양반]


“뿜빠이해.”

ㅡ뭔 소리에요? 대뜸?

“니가 내 카드 긁은 거! 뿜빠이 하라고!”

ㅡ형이 내겠다고 했잖아요.

“사백만원이나 긁겠다는 말은 안 했잖아.”

ㅡ쪼잔해.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요. 나와요. 집 앞이야.

“뭐?”


지민은 부엌에 달린 창으로 바깥을 내다 봤다. 정국의 SUV가 좁은 골목을 꽉 채우고 서 있었다. 정국이 차에서 내렸다.


ㅡ나 담배 딱 두 대만 필거니까 그 안에 나와요.

“야!”


정국이 전화를 끊었다. 정국은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민은 그런 정국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헤집었다. 얜 도대체 뭘 어쩌자고 날 자꾸 불러내는 거야? 씨부렁대면서도 지민은 후드티를 집어입고 모자를 뒤집어썼다. 세수는 과감히 생략했다. 이빨만 대충 닦고 거울로 모습을 확인했다. 줘도 안 먹을 것 같은 부랑자가 한 명 서 있었다. 그래! 이 정도면 천년의 정력도 식겠어! 지민은 슈퍼 갈 때나 신는 다 떨어진 쪼리를 꿰어 신었다. 밖으로 나가자 정국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왜 불렀어.”


막 두 번째 장초를 다 태운 정국은 지민의 꼴을 위아래로 훑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싫다. 졸라 매너 없는 거 아니에요?”

“네가 빨리 나오라며! 나 아파.”

“뻥 치지 마요.”

“진짜야. 나 그날 쓰러졌-”


정국이 긴 다리만큼이나 큰 보폭으로 성큼 다가와 지민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한 손으로는 자신의 이마를 짚은 채 열을 가늠해본다. 지민은 불시에 훅 들어온 정국의 얼굴 때문에 흡 숨을 삼켰다. 헉, 존잘..!


“열은 없는데? 개구라 칠래요?”

“치워봐!”


지민이 정국의 손을 떼 냈다.


“왜 불렀냐구.”

“일단 타요. 배고파. 밥 먹으러가요.”

“어디로?”

“가보면 알아.”

“나 방금 밥 먹었어.”


꼬르륵. 지민의 위장이 어서 에너지원을 넣어달라고 응석을 부렸다. 정국이 픽 실소를 흘렸다. 지민은 얼굴이 잘 익은 방울토마토의 색깔로 변했다.


“하여튼 입만 열면 구라.”

“아, 몰라. 가! 가!”


지민이 정국을 지나쳐 SUV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정국의 SUV는 원룸촌을 벗어나 한참 서울 시내를 누볐다. 정국과 탁구공 주고받듯이 틱틱거리면서 말싸움을 하다 보니 어느새 그랜드 하얏트 호텔 앞이었다.


“바, 밥을 여기서 먹자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야, 야. 잠깐만.”

“왜요. 오늘은 내가 낼게요.”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내 꼴을 봐.”

“난 뭐 상관없어요. 철판요리 괜찮죠?”


정국이 뒷걸음질 치는 지민을 끌고 들어갔다. 정국의 차는 이미 발렛을 맡겨 어차피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태였다. 지민은 쪼리에 걸린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정국을 따랐다.


“야. 너랑 나랑 이런데 오는 건 좀 아니지 않냐?”

“뭐가 아닌데?”


식당가를 대폭 리모델링을 한다더니 이렇게 바뀌었구나. 지민은 몇 달 전 부모님 결혼기념일 식사자리를 예약하다가 실패한 경험을 반추하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소월로 322라고 적힌 표지판을 지나자 목재 벽에 TEPPAN이라 새겨진 레스토랑의 입구가 나왔다. 정국이 예약을 해놓았는지 바로 자리를 안내받았다. 지 입으로 ‘선생질’하느라 벌이가 시원찮다는 놈이 호텔 레스토랑을 자기 집 안방처럼 익숙하게 누빈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뷰가..”

“나쁘지 않죠?”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테이블과 마주한 셰프 스테이션 너머로 전면창이 위치하고 있었다. 한강이 훤히 내다보이는 자리였다. 지민이 서울의 야경에 감탄하는 사이 정국은 코스 A, B로 주문을 마쳤다. 코스 구성은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철판쑈가 지민을 확 사로잡았다. 셰프는 시종일관 위트 있는 농담을 섞어 메뉴를 설명해주었다. 인생 통틀어 몇 번 입에 넣어보지 못한 푸아그라는 꿀맛이었고 정국도 드물게 정상인 아니.. 젠틀맨처럼 굴어서 마음이 놓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환상적인 저녁이었다. 지민은 디저트로 나온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싹싹 긁어먹으면서 정국에게 물었다.


“이런 데는 미영이랑 와야 하는 거 아니야?”

“잘 먹여놨더니 또 시비네.”


정국과 지민은 식사를 마치고 파리스 바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는 아까보다 뷰가 더 좋았다. 지민은 이거 너무 완벽한 데이트 아닌가? 최대리가 여자친구한테 프로포즈할 때 이런 식으로 코스를 짰던 것 같은데.. 지민은 찜찜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정국은 맥켈란 18년산을 바틀째로 주문했다. 지민은 눈이 튀어나올 뻔 했다. 얘 또 나한테 내라고 하는 거 아냐? 어차피 한도초과 뜰 거지만..


“너 나한테 왜이래?”


지민은 위스키 세 잔에 얼큰하게 취해버렸다.


“우리 만남의 목적이 뭐야?”

“뭐가요?”

“처음 만났을 때는 자자고 협박하더니. 막상 만나니까 바가지나 씌우고. 또 지금은..”


오늘은 진짜 모르겠다. 뭘 하자는 건지.


“사실”

“웅..”

“오늘 내 총각파티예요.”

“에?”


정국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태원에 작은 클럽하나 빌려서 친구들이랑 놀까했는데.. 의미 없어 보여서 관뒀어요.”


정국은 반쯤 남아있는 위스키를 원샷했다. 아이스볼이 딸그락 소리를 내며 컵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늘 형한테 내 예산 몰빵했으니까 재밌게 해줘야 해요.”

“….”

“왜요, 또. 착하게 말해도 노려봐.”

“..너 미영이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별로.”

“그럼 나한테는?”

“왜 갑자기 진지-”


지민은 깨달았다. 정국이 그렇게 씨발놈이 아니란 걸. 그래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화도 나고,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단전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너 메리지 블루지? 요즘 그거 유행하냐?”


지민은 정국에게서 태형을 보고 있었다.


“부인한테 잘해. 엄한 사람 들쑤시지 말고. 나 네 일탈에 조연으로 출연할 생각 없어. 네 자기만족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할 생각 없으니까..”


지민은 태형에게 할 말을 정국에게 쏟아냈다. 울컥 감정이 목에 걸렸다. 지민이 말을 멈췄다. 정국은 지민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착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나 간다. 앞으로 네가 뭔 짓거리를 하든 관심 없어. 나 불러내지 마.”


지민이 빠른 속도로 바를 빠져나갔다. 정국은 급하게 계산을 하고 지민을 따라잡았다. 지민은 곧 정국에게 어깨를 잡혀 뒤돌려 세워졌다.


“또!”

“….”

“또 너 때문에! 애써 다 잡아가는 내 인생 다시 시궁창으로 처박힐 뻔 했어!”

“….”


지민이 씩씩 대면서 숨을 골랐다. 정국은 지민이 감정을 가라앉히고 제대로 자신을 봐주길 기다렸다. 지민의 눈동자에 일었던 불꽃이 사그라졌다. 지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잠깐 정신줄을 놔버렸다. 미쳤나 봐. 얘한테 뭔 소릴 지껄인 거야.. 물론 더 이상 만날 생각이 없는 건 맞지만..


“1006호예요.”


정국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민이 고개를 들었다. 정국의 표정은 아주 차분했다.


“스위트룸 잡았어.”

“….”

“총각파티라고 했잖아요.”

“….”

“나 억지로 하는 거 안 좋아해요. 울며 겨자 먹기 식도 싫어. 그래서 이런 수고로움 마다하지 않은 거야. 제 발로 나한테 안기려 만들려고.”

“….”

“근데 결론은 형이랑 해야겠다는 거고.”

“….”

“지금 네가 보여준 지랄 덕에 좀 빡돌았어.”

“….”

“어떻게 김태형이랑 나랑 착각할 수가 있지?”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여즉까지 빠져나갈 궁리만 해?”

“..난 이제 뭘로 협박해도 너랑 할 생각 없다고 했다.”


지민은 잡힌 어깨를 빼내려 했지만 정국의 악력이 무지막지했다. 아.. 지민은 신음하면서 인상을 썼다.


“진짜 없을까요?”

“어. 미영이도 안 돼.”

“나 이혼 할 거야.”

“맘대로 해. 그게 미영이한테도 그 편이 유익하겠-”

“그래? 그럼 이런 건 어때요? 내가 이유나한테 형이랑 김태형이 어떤 관계였는지 다 불어버리는 거예요. 남자랑 사귀었다는 것만으로도 파혼감 아닌가?”

“….”

“플러스 어쩌면 현재진행형일지도 모르는 관계를 눈앞에서 해부해 주는 거죠.”

“….”

“나 지금 메스 들었어. 카데바로 테이블 위에 올라올래요 아니면 얌전히 스위트룸으로 올라갈래요?”


지민은 부들부들 떨면서 정국을 노려봤다. 정국 역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태형 때문에 망가진 지민이 조금 딱하긴 했으나.. 자기가 이 정도로 비겁해 질 줄은 몰랐으나.. 구차하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가.”

“잘 생각했어요.”


어쩐지 멈출 수가 없었다. 한 번 자면, 그래 하룻밤만 보내면, 이 이상한 병 같은 집착을 끊어 낼 수 있겠지. 한 번이다. 그 한 번을 못해서 이렇게 된 거다. 정국은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다. 지민과 정국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엘리베이터가 10층에 도착할 때까지 둘 사이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정국이 먼저 내렸다. 지민은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서 정국을 쳐다보았다. 정국은 이대로 지민이 도망쳐 버릴까봐 불안해졌다. 지민이 어렵게 입술을 뗐다.


“다 리셋하고 나하고 정상적으로 다시 시작 해볼 생각 없어? 친구의 남편 아내의 친구가 아니라 아는 형 동생으로라도.”

“이제 와서?”


정국이 엘리베이터베이터로 성큼 들어와 물었다.


“이제라도.”


지민이 자신 없게 대답했다. 뭐가 어디서부터 꼬인지 모르겠지만.. 이제라도 그래 볼 순 없겠냐?


“없어요.”


정국은 지민의 작은 바람을 무참히 짓밟았다. 정국이 지민을 엘리베이터 밖으로 끌어냈다. 지민의 등 뒤로 지민을 뱉어낸 엘리베이터가 입을 다물었다. 정국의 눈동자가 지민을 똑바로 마주봤다.


“너랑은 그런 거 못해.”

@mysteryhomo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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