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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seworld 1

밤.


오랜 시간 침대에 누워 있던 정국은 결국 이불을 떨치고 일어났다. 오늘은 기필코 잠에 들리라 작정하고 수면유도제까지 먹었건만 정국은 2시간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국은 침대헤드에 등을 기댔다. 협탁을 더듬어 스탠드를 켰다. 옅은 주황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정국의 지친 얼굴을 비쳤다. 입술에 일어난 각질을 이빨로 잡아 뜯으면서 정국은 맞은 편 벽을 의미 없이 쏘아봤다.


생각.


그래, 생각이 문제였다. 머릿속이 수많은 생각으로 가득 차있어 수마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현재의 막막함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한데 엉켜 정국의 숨통을 졸랐다. 생각이 깊어질 때면 정국은 중력의 작용을 배로 받는 이처럼 온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괴로워했다. 정국은 협탁 서랍으로 손을 뻗어 아이패드를 꺼냈다. 사진첩에는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이 저장되어 있었다.


형.


사진은 모두 지민에 대한 기록이었다. 정국은 사진에 취미가 없었지만 지민을 찍는 것을 좋아했다. 연애 초기의 지민은 카메라를 들이대는 족족 손으로 얼굴을 가리던 부끄럼쟁이였다. 덕분에 그 때의 사진들은 온전한 것이 없다. 죄다 흔들리고, 초점이 나가고, 손바닥으로 프레임이 반쯤 가려진 것들뿐이다. 정국은 엉망진창인 사진들을 하나도 지우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했고, 지금은 그랬던 자신에게 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다. 사진을 손가락으로 넘길 때마다 정국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사진은 정국과 지민의 시간들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여행.


한창 타오르던 시기의 둘은 함께 여행 다니는 것을 낙으로 살았다. 일 년 동안 국내 관광지를 모두 섭렵하고 그 이후엔 세계 곳곳을 누비며 추억을 쌓았다. 만리장성 앞에서 차렷 자세로 촌스럽게 찍은 사진을 보며 큭큭 대던 정국은 카파도키아의 열기구를 배경으로 찍은 지민의 뒷모습 사진에 아련한 눈빛을 하다가 태국 코끼리 위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은 지민을 보고 피식 식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국은 두바이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하며 찍었던 영상을 한참이나 반복재생 했다. 스페인, 영국, 독일, 브라질, 미국 등등이 정국의 빠른 손동작에 휙휙 지나갔다. 복잡한 풍경과 문화를 담아낸 사진들이 점점 뜸해지고 잔잔한 일상을 담은 사진이 잇달아 나타났다. 한껏 올라가있던 정국의 입꼬리가 느긋한 모양으로 내려왔다.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정국의 표정은 편안해보였다.


쉴 새 없이 사진을 넘겨보던 정국의 손이 뚝 멎었다. 화면에는 잠자는 지민의 모습이 담겨있다. 정국은 천천히 다음 사진을 확인했다. 수백 번 보고 또 본 것이라 이 다음에 어떤 것이 나올지 잘 알고 있었으나 마치 그것들을 처음 확인하는 사람처럼 정국은 긴장했다. 정국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이불을 대충 휘감고 있는 지민의 몸은 완전히 나체는 아니었으나 묘한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히 선정적이었다. 섹스 후에 지쳐 잠든 지민을 몰래 찍는 것은 정국의 은밀한 취미였다. 땀으로 엉겨 붙은 지민의 머리카락 위에 얹어진 손은 자신의 것이다. 사진을 보는 정국의 눈에서 열기가 일었다. 정국은 아이패드를 다리 사이에 던져두고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부풀어 오른 성기가 손에 잡혔다. 화면 속 지민을 보면서 손을 놀리던 정국은 갈증이 심한 사람처럼 자주 침을 삼켰다.


절정.


좀처럼 절정이 오지 않았다. 정국은 바지 속에서 손을 빼냈다. 그리고 초점 잃은 눈으로 한참을 앉아있었다. 긴 시간 끝에 겨우 탈력감에서 벗어난 정국이 여전히 유혹적인 자세로 누워있는 화면 속 지민을 보았다. 정국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나온 정국은 발소리를 죽이며 거실을 가로 질렀다. 그리고 어떤 방문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문고리를 돌리는 정국의 동작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문은 끼익대는 소리하나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닫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국은 방 안쪽에 위치한 침대에 누워있는 지민을 보았다. 지민은 벽을 향해 누워있어 정국이 위치한 곳에서 보이는 것이라곤 지민의 뒤통수와 동그란 귀 그리고 얇은 인견이불 덕에 드러난 몸의 실루엣뿐이었다. 정국은 조심스럽게 침대의 발치로 다가가 이불 끝을 잡았다. 지민이 깨지 않을 정도로 아주 천천히 이불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이불은 뱀처럼 지민의 몸을 타고 넘었다. 이윽고 이불이 지민의 허벅지까지 끌어내려졌다. 정국은 뒤로 물러섰다. 지민은 품이 큰 반팔 티와 하늘색 여름 파자마를 입은 채였다. 정국은 자신이 선 자리에서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내리고 자위를 시작했다. 혹시나 신음이 새어나올까 입술을 꾹 다물고, 손놀림도 소리가 나지 않게 신중히 했다.


섹스.


지민과 섹스를 안 한지 일 년이 다 되어간다. 정국은 그동안 욕구를 이런 식으로 해소했다. 정국의 입장에선 무척이나 답답한 일이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자신은 지민이 아니면 충족할 수 없었고 지민은 준비가 덜 되었다. 그래서 정국은…


“읏-”


정국의 성기가 진한 정액을 토해냈다. 손바닥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바닥에 까지 몇 방울 뚝뚝 떨어졌다. 정국은 가슴을 크게 들썩이는 걸로 숨을 고르고 속옷과 바지를 올려 입었다. 지민의 방에서 나와 화장실로 갔다. 물을 최대한 약하게 틀고 손을 씻은 뒤, 휴지를 손에 돌돌 말아 가져나왔다. 바닥에 흘린 몇 방울을 닦을 요량으로 말이다.


발기.


손을 닦는 사이에 정국의 성기가 다시 발기했다. 다리 사이에서 묵직하게 존재를 주장하는 성기를 슬슬 옷 위로 쓸면서 정국은 위험한 고민에 빠졌다.


잠깐 만지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허벅지나 팔뚝의 안쪽 살을 손가락으로 만지는 정도에는 깨지 않을 것이다. 지민은 잠귀가 어두운 편이니 더한 걸해도 될지 모른다. 손으로 내 것을 쓸어볼까? 입술에 대었다 떼어 볼까? 아니, 아예 입안에 넣었다가 빼도 지민은,


철컥


방의 문고리를 돌리던 정국의 손이 굳었다.


“…….”


정국은 다시 문고리를 돌려보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문고리는 잠겨 돌아가지 않았다. 정국은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가라앉은 눈빛으로 문을 쳐다봤다. 마치 문 너머의 지민의 움직임을 투시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수분이 지날 때까지 문 앞에서 요지부동하던 정국은 고개를 돌려 거실의 시계를 확인했다. 3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따로 요구하지 않아도 매일 규칙적으로 8시에 일어나는 지민이었다. 여기서 더 잠을 설치게 한다면 피곤을 느낄 것이다. 정국은 닫힌 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쥐죽은 듯 조용한 문 안쪽에 대고 정국이 말했다.


“잘 자요. 형.”


















식탁에는 정국이 공들여 차린 반찬으로 가득했다. 여름만 되면 입맛을 잃는 지민을 알기에 지민이 좋아하는 것으로만 가득하게 식단을 꾸렸다. 지민이 젓가락을 집기에 가까운 곳에 계란말이를 놓고, 뚝배기로 지은 흰 쌀밥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수저까지 정갈하게 세팅하고 마지막으로 보글보글 끓는 얼갈이 된장찌개를 식탁의 정 가운데에 내려놓은 뒤 앞치마를 벗었다. 주방 옆에 위치한 전신거울에 옷매무새며 생김새를 꼼꼼히 살폈다. 붕 뜬 옆머리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정리한 정국이 마침내 지민의 방문 앞에 섰다. 정국은 정중하게 방문에 노크를 했다.


“형. 일어났어요?”


문 안 쪽에서는 답이 없었다.


“아침 다 됐어요.”


하지만 정국은 지민이 방 문 앞에 서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문고리에 손을 댄 채, 통통한 입술을 짓씹으면서 용기를 내고 있겠지. ‘나’를 상대할 용기를 가까스로 쥐어짜고 있을 거야.


“식으면 맛없어요. 오늘 병원도 가야하잖아.”


정국이 지민을 얼렀다. 몇 초가 지나고 방문이 열렸다. 굳은 표정의 지민이 나타났다. 지민은 정국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정국을 비껴지나갔다. 곧장 식탁에 앉아 급하게 물을 들이키며 목을 축인다. 밤새 어지간히 목이 말랐나보다. 금세 물 한 컵이 지민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정국은 말없이 지민의 빈 물 컵을 들고 정수기로 가서 물을 한 가득 채운 뒤 지민의 앞에 다시 내려놓았다.


지민은 자신 앞에 놓인 식기와 반찬들을 눈으로 훑었다. 마치 음식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는 검사관처럼 형형색색한 눈빛이었으나 정국은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한 것은 지민이었다.


오늘 정국은 포크대신에 플라스틱 젓가락을 놓았다. 젓가락을 응시하는 지민의 동공은 한참 흔들렸다. 지민이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젓가락을 잡았다. 어색하게 젓가락을 몇 번 만지작거린다. 워낙에 정석 젓가락질을 하던 지민이라 자세를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생각보다 순조로운 상황에 지민의 입 꼬리가 살짝 풀어졌다. 지민은 조심히 두부조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뚝배기 밥 위로 그것을 가져왔다. 문제없이 해냈다. 안심한 지민이 두부조림을 입에 넣으려 했을 때, 지민의 손가락이 힘을 잃으면서 젓가락과 두부조림을 떨어뜨렸다. 하늘색바지 위에 낙하한 두부는 지민의 허벅지에서 튕겨 바닥에 떨어졌다. 지민은 이를 악물었다. 바닥에 떨어진 젓가락을 다시 집고 이번에는 계란말이를 공략했다. 한번 균형을 잃으니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됐다. 계란말이는 뚝배기까지 가져오지도 못했다. 석박지는 지민의 하얀 티에 김칫국물을 남겼고, 도토리묵은 처참하게 뭉개져 식탁을 더럽혔다. 지민은 젓가락을 내던지듯 내려놓고 숟가락을 잡았다. 된장찌개를 뜨는 지민의 손이 지나칠 정도로 굳어있었다. 지민이 숟가락에 입을 대었다. 그 순간, 손이 경련을 일으켰다. 지민은 숟가락을 놓쳤고 된장찌개의 국물이 온 사방에 튀었다. 지민은 씩씩댔다.


“형.”


그 꼴을 보고만 있던 정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민의 눈이 커졌다. 정국은 식탁 옆에 반듯이 개어놓은 냅킨과 앞치마를 들고 일어섰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챈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걸 정국이 눌러 앉혔다. 자신의 어깨에 내려앉는 묵직한 힘에 지민은 숨을 삼켰다. 지민은 어느새 돌처럼 굳어버렸다. 정국은 지민의 목에 냅킨을 둘러주고 앞치마도 입혀주었다. 정국의 손가락이 지민의 신체를 스칠 때마다 지민은 움찔움찔 놀라며 몸을 떨었다. 정국은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정국은 지민 옆에 앉았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자신의 수저를 가져와 반찬을 올리고 지민의 입가로 가져갔다. 바로 앞에서 수저를 흔들어도 지민은 입술을 열 생각을 안했다. 정국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천천히 하면 될 거에요. 이제까지 잘해왔잖아요. 다시 포크로 시작해요. 그럼 문제없을 거야.”

“….”

“제가 젓가락 줘서 화났어요?”

“아니….”

“그럼 좀 있다가 형 손으로 먹을래요? 난 여기 좀 치울게요.”

“…그냥 줘.”


정국이 다시 숟가락을 가져가 대었고 지민은 얌전히 그것을 받아먹었다. 지민이 오물오물 음식을 씹는 것을 보면서 정국은 머릿속으로 오늘 하루 일정을 정리했다.


“재활치료는 두시예요.”

“응.”

“전 오늘 일이 있어서 잠깐 자리 비울 것 같아요.”

“….”

“형도 그게 편하죠?”


지민의 침묵은 대개가 긍정이다.


“끝나기 전에 갈게요. 혹시 일찍 끝나거나 문제 생기면 전화해요.”

“알았어.”


고된 식사시간이 끝났다. 정국은 지민의 냅킨과 앞치마를 벗겨주고 딱딱하게 굳은 팔과 다리를 마사지했다. 가끔씩 이런다. 지민의 몸은 평소 땐 다 나았다고 착각할 만큼 멀쩡한데 경련만 오면 아무 것도 못하고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안 좋아져버린다. 뭉친 근육이 풀리는 것을 확인한 정국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욕조 가득 채워놓은 뜨거운 물은 식사를 하는 동안 알맞게 식어 따듯한 온도가 되어있었다. 정국은 욕조에 심신안정에 좋다는 피톤치드 입욕제를 넣었다. 그리고 지민을 불렀다. 지민은 엉거주춤하게 화장실 문가에 섰다. 정국은 화장실에서 나왔다. 지민이 조심스레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지민이 몸을 씻고 다시 나오려면 1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정국은 그동안 난장판이 된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고, 외출 준비를 마칠 것이다. 지민의 머리를 말려주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움직여야한다. 정국은 팔을 걷어붙였다.














지민이 사고를 당한 건 1년 전이다.


지민의 시험기간이었다. 도서관에서 밤을 새고 온다는 지민에게 단호히 귀가를 명령했다. 또래들이랑 제대로 어울려 본 경험 없이 늘 상 어른들만 상대한 영향인지 정국은 나이답지 않게 보수적인 편이었다. 정국은 지민의 동거인이자 애인으로서 지민이 하지 않았으면 하는 여러 가지 행동들을 정해주었고 외박도 그중 하나였다. 어디 집나가서 잘 생각을 하냐고 꾸짖고, 아침에 학교까지 모셔다 준다는 말로 달랬다. 지민은 한숨을 쉬며 알았다 대답했다. 정국은 집 앞 사거리 신호등까지 지민을 마중 나갔다. 지민이 정국을 발견하자마자 신호등의 초록불이 깜빡거렸다. 지민은 뛰어서 횡단보도의 중간까지 순식간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시커먼 것이 튀어나와 지민을 치고 지나갔다. 차는 자신이 사람을 친 것을 모르는 것처럼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질주했다. 정국은 도로에 널브러진 지민의 몸뚱이를 경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정국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움직여 지민 옆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어어 거리면서 지민의 상태를 확인했다. 지민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팔은 이상한 각도로 꺾여있고 숨은 가느다랬다. 정국은 지민의 몸을 끌어안고 주변을 둘러봤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지민과 마찬가지로 늦은 귀가를 하던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이 입은 야구잠바에 주변에 위치한 학교마크가 붙어있었다. 대학생들은 눈뜨고 혼절한 정국을 끌어내고 핸드폰으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 정국은 힘없이 끌려가 도로에 주저앉았고 바닥에 진득한 피를 흘리는 지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민은 10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다.


정국은 수술방 밖에서 온갖 불길한 생각들을 했다. 의사들이 깨지고, 조각난 지민을 맞춰가는 동안 반대로 정국의 정신은 조금씩 허물어져 종국엔 폐허가 됐다. 10시간은 정국이 망가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날이 환히 밝고 나서야 수술이 끝났다. 정국은 문을 열고 나오는 의료진들을 절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조금 지친 표정의 의사가 큰 고비는 넘겼지만 상태가 안 좋아 앞으로를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대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 정국은 현실감을 찾지 못했다. 지민은 며칠 동안 생과 사를 오락가락했다.


지민의 몸은 연약한 생명줄을 붙들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냈다. 정국은 지민의 손을 잡고 매일 애원했다. 살기만 해달라고, 살아만 달라고. 정국의 바램은 이뤄졌다. 지민은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났다. 허나 의식을 찾진 못했다. 지민에게 식물인간이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그쯤 되자 정국은 모든 게 다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사고를 당한 것도,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것도. 정국은 우울증에 걸렸다. 하루 종일 지민의 얼굴만 들여다보는 정국을 억지로 끌어낸 것은 지민과 정국의 가까운 지인이자 심리치료사로 일하고 있는 호석이었다. 정국은 강력한 우울증 치료제를 처방받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호석과 이야기를 나눴다. 바뀐 것은 그 뿐이었다. 내도록 지민 곁에 앉아 지민을 지켜봤다. 그렇게 가을과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봄. 모든 생명이 태동하는 그 아름다운 계절에 기적처럼 지민이 눈을 떴다.



















“3시 50분에 와서 대기실에 앉아있을게요. 혹시나 늦으면 연락 할 테니까 어디가지 말고 대기실에서 기다려요. 알겠죠?”

“응.”


정국은 지민에게 여러 번 일정을 확인시켰다. 그 모습이 초등학생 아이에게 준비물을 챙겼냐고 닦달하는 극성맞은 엄마 같았다.


정국은 지민을 물리치료사에게 인도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약속시간은 이미 20분이나 지나있었지만 정국은 느긋하게 이동했다. 병원을 나와서 길모퉁이를 돌자마자 보이는 스타벅스, 창가에 앉은 호석은 아메리카노의 스트로를 입에 물고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호석의 빈 옆자리에는 정국의 것으로 보이는 음료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정국은 스타벅스에 들어가 자연스럽게 호석의 옆에 앉았다. 호석이 에어팟을 빼고 노트북을 접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나 바빠.”

“바쁘면 안 만나면 되잖아요.”


어지간해서는 안면을 굳히지 않는 호석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이 쥐톨만한 걸 한 대 팰 수도 없고 진짜.”

“또 쥐톨이래. 이제 제가 형보다 클걸요?”

“야. 재 봐. 재 봐. 일어서.”

“됐어요.”


호석은 정국이 일부러 얄밉게 구는 것을 알고 있어 그 정도로 타박을 끝냈다.


“지민이는 어때?”

“비슷해요. 좋다가, 안 좋다가.”

“넌 맨날 그 소리더라. 구체적으로 말해봐.”


호석의 요구에 정국의 표정이 굳었다. 오늘 아침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경련이 또 왔어요. 그저껜 발작이 심해서 응급실에 데려갔고..  주말에는.”


정국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제가 자릴 비운 사이 혼자 집 밖으로 나갔었어요. 집에 오니까 없더라고요.”

“혼자?”

“네. 멀리는 안 가고.. 자기 사고당한 사거리에서 잠깐 기절했었나 봐요. 주변사람들이 버스정류장에 의자에 앉혀놓은 걸 데려왔죠.”

“지민이 많이 놀랐겠네.”

“네.”

“…그리고 너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지민이 군중에 둘러싸여 있었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나왔는지 옷차림이 제법 제대로였다. 신발장 맨 윗칸에 숨겨놓은 운동화까지 찾아 신고 어딜 가려 했던 걸까? 정국은 지민 앞에 서서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자신이 지민의 일행인 것을 눈치 챈 구경꾼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을 갔다. 버스정류장에는 지민과 정국만 남았다.


‘일어나요. 형.’


지민이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정국은 지민의 눈을 관찰했다. 정확히는 눈 안에 담긴 것들을 가늠해보았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읽혔다. 혼란스러움, 창피함, 낯섦, 무기력함 등등이 말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지배적이었던 것은,


‘집에 가요.’


두려움.


“기억 쪽은 어때?”


호석은 정국이 오랫동안 지키고 있던 침묵을 깨고 또 다른 물음을 던졌다.


“전혀 나아진 게 없어요.”

“치료는 여전히 안 받겠다는 입장?”

“네. 질색하죠.”


해리성 기억상실증. 사고 이후 지민은 7년간의 기억을 잃었다. 7년은 정국이 지민과 사랑한 시간과 정확히 일치한다. 지민은 스무 살까지의 자신만을 기억했다. 정국을 동생으로만 여기던 때로 회귀한 것이다. 통속 드라마의 흐름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상황을 맞닥뜨린 정국은 제일 먼저 헛웃음이 나왔다. 그 뒤에는 절망했고 얼마간은 희망에 젖어도 봤지만 또 다시 망연자실했다. 7년간의 빼곡한 기억들. 서로에게 닿기 위해 치열히 부딪쳤던 나날들을 지민으로 하여금 완전히 납득하게 만들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망상장애는?”

“최악.”

“어떻게?”

“더 구체적이어졌어요.”

“어떤 식으로?”

“잠꼬대로 이상한 말들을 쏟아내요. 발작할 때는 더 심하고요.”

“무슨 말들?”

“그냥 헛소리예요. 듣도 보도 못한 명칭 같은 거. 인터넷에 검색해 봐도 나오는 게 없어요.”

“…치료 받아야해. 좀 힘들더라도,”

“네. 그래야 돼요. 근데 그때 형도 봤잖아요. 아직도 치료 얘기 나오면 까무러쳐요.”


겉으로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호석이 보기에 정국은 한계였다. 스트레스가 임계점 직전까지 차올라서 위협적인 경고등이 울리는 상황이다. 호석은 정국의 무릎을 손으로 짚었다. 창밖을 응시하던 정국의 시선이 호석 쪽으로 옮겨졌다.


“너도 휴식이 필요해.”


휴식. 정국이 늘 원하던 것이며 짧지 않은 삶에서 단 7년 동안만 쟁취할 수 있었던 그것. 정국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민이 깨어난 기적의 봄. 눈을 뜬 지민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정국을 보고 비명을 지르는 것이었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지 지민은 악! 소리를 한 번 지르고 내도록 끅끅대다가 다시 정신을 잃었다. 혼절한 지민을 보면서 정국은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몰라 당황했다. 환자의 안정이 우선이라고 윽박지르는 간호사들에게 끌려 나가 몇 시간 동안 병실 밖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국의 가슴은 기분 좋은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형이 깨어났다. 형이 다시 돌아왔어. 나한테 다시 돌아와줬어!


수분이 지나고 안면이 익숙한 간호사가 병실에서 나왔다. 정국은 그녀의 팔뚝을 붙들고 지민이 깨어났냐고 물었다. 간호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어디가 안 좋아요?’

‘아뇨. 그게 아니라…’


간호사는 우물쭈물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환자가 이상한 소릴해요.’


그 말은 지민의 망상장애에 대한 최초 진단이 되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 본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을 거야. 지민이의 머리에 박혀있던 수많은 기억들이 갈등하고 혼재해서 혼란의 장을 만들어 낸 거지. 그리고 그 카오스 속에서 지민은 각각의 개체들을 올바르게 매치 시키지 못하고 자신만의 엉망진창 신화를 만들어 냈어. 널 주인공으로 하는.”


호석이 늘 하는 말을 또 지루하게 늘어놓았다.


지민은 식물인간상태로 긴 꿈을 꾸는 동안 어떤 사건들을 ‘목격’했다고 그랬다. 그 사건들은 모두 정국에 관한 것이었다. 지민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하나같이 허무맹랑했다. 남들이 들으면 웬 판타지 소설이냐고 코웃음 칠만한 것이었다.


지민의 망상 속에서 정국은 술탄이었고, 지민은 정국이 정복한 땅의 유목민이었다. 지민의 배경묘사는 중앙아시아의 유목사회와 닮아있었다.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광야와 마른 풀들이 돋아난 초원지대를 오가며 살던 지민은 운이 나쁘게도 사막의 약탈자로 명성이 높았던 정국의 군대를 만났고, 정복당했고, 비굴한 목숨이라도 이어가려했으나, 종국에 그의 칼에 일족이 죽임을 당했다고 말했다.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기는 그러했다.


정국은 그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잃어버린 7년간의 기억처럼.. 망상장애도 몸이 나으면 저절로 사라질 거라고 여겼다. 허나 그런 정국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망상장애는 지민의 몸이 괜찮아지는 정도와 비례해서 악화되었다. 지민은 뼈대만 있던 이야기에 살을 붙여나갔다. 이야기가 풍부해지면 질수록 정국에 대한 증오심은 더욱 커져갔다. 그리고 결국 지금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형.”

“어.”

“치료는 제가 먼저 받아야겠어요.”


정국의 말에 호석의 귀가 쫑긋 섰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래. 잘 생각했다. 임마. 너도 숨통 좀 터야지.”

“숨통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닌데.”

“응?”


눈이 물음표로 변한 호석을 보면서 씩 웃은 정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국은 먼저 간다는 인사와 함께 스타벅스를 나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병원 재활치료실을 향해 걸었다.


정국이 도착했을 때, 지민은 잠깐의 쉬는 시간을 마치고 다시 재활치료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정국은 대기실에 서서 지민이 재활치료를 받는 모습을 지켜봤다. 재활치료사와 이야기를 하면서 간간히 웃음을 터뜨리던 지민이 재활치료사의 어깨너머로 정국을 발견했다. 정국은 손바닥을 흔들어 인사를 했으나 지민은 시선을 피해버렸다. 지민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가셨다. 반가움의 호선을 그리던 정국의 손동작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정국의 입매가 한일자로 다물렸다.


그래, 잘 생각한 거다. 내키진 않았지만 자신에게는 상담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숨통’ 같은 한가한 문제 때문이 아니다.


요즘 정국은 자신을 거부하는, 사랑했던 기억을 모두 잃고 헛소리를 해대는 지민을 보면서 자꾸, 자꾸만


‘정국아. 우리 이제 그만하자.’


화가 났다.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에 그랬던 것처럼.





















“도서관에 잠깐 들러줘.”

“도서관이요?”


정국의 반문에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출증은 있어요?”


지민이 자신의 지갑에서 도서관 카드를 꺼내보였다. …저걸 대체 어디서 찾았을까? 정국은 고개를 끄덕여주고 도서관으로 향하기 위해 좌회전을 했다. 도서관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서려는 정국을 지민이 제지했다. 지민은 손짓으로 도서관 앞에 주차금지 구역을 가리켰다. 정국은 난감해졌다.


“오래 걸리면..”

“오래 안 걸려.”


이미 책을 골라놓았나 보다. 지민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정국도 따라서 내리려는데 지민이 됐어라는 말로 정국을 다시 한 번 제지했다.


“나 혼자 다녀올게.”


지민의 눈빛이 단호해서 정국은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은 도서관 안으로 사라지는 지민의 뒷모습을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지민은 얘기한 대로 몇 분 지나지 않아 도서관을 나왔다. 메신저 백이 두둑하게 차오른 걸 보아 여러 권을 빌렸나보다. 웬일로 가방을 챙기나 했더니 이것 때문에 그랬나보군. 책을 읽는 다는 건 긍정적인 변화일까? 정국은 운전을 하면서 독서가 지민의 상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따져보았다. 정서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한데, 망상증이 더 심해질 것 같기도 하고…


정국은 흘끔 지민을 엿보았다. 지민은 가방을 꼭 끌어안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포착한 정국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정국은 지민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지민에게는 마트에 들러 장을 봐온다 했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차에 탄 정국은 폰으로 시립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정국은 지민의 아이디를 입력했다. 패스워드 창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기억을 더듬던 정국의 머릿속에 지민이 자주 쓰는 패스워드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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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단박에 로그인이 되었다. 정국은 마이페이지의 대출목록에 들어갔다. 지민이 오늘 대출한 책들이 줄줄이 떠 있었다.


[멀티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김영사

[평행우주라는 미친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는가 (패러다임을 뒤흔든 논쟁의 과학사)] 토비아스 휘르터 지음, 김희상 옮김 | 알마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율리 체 지음, 이재금 옮김 | 민음사


정국은 시꺼멓게 물든 눈으로 목록들을 재차 확인했다. 어느새 정국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정국은 거칠게 차를 몰아 주변에 위치한 서점에 도착했다. 작은 서점이라 해당 목록에 있는 책들 중 하나만 재고가 있었다. 정국은 그것을 구매했다. 그리고 다시 차로 돌아와 운전석에 앉자마자 책을 집어 들었다. 정국은 책의 중간 페이지를 있는 대로 쫙 펼쳤다.


「우리는 생명이 발달할 확률이 0보다는 크다고 믿는다. 지구에서도 결국 생명은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바로 그래서 무한한 우주에는 무한하게 많은 문명들이 존재함이 틀림없다. 이 문명들에는 우리의 복사본이 모든 연령대로 있어야만 한다. 누군가 죽음을 맞을지라도, 광활한 우주의 어딘가에는 똑같은 기억과 과거 경험들을 가진 무한하게 많은 분신이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저 먼 미래까지 함께 고려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영원한 삶을 살아간다.」
























“보지만 말고 하나 드셔 봐요.”


과일 매대의 직원이 정국의 손에 막무가내로 수박을 쥐어줬다. 카트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로 정신이 나가있던 정국은 화들짝 놀라 수박을 받아들었다. 수박의 시뻘건 속살을 한 입 베어 무니 당도가 높은 과즙이 입안을 적셨다. 직원의 설명대로 꿀맛이다.


지민은 과일에는 입도대지 않지만 유일하게 수박만은 좋아했다. 그래서 정국은 다른 과일은 몰라도 수박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골랐다.


매대에 줄맞춰 늘어선 수박들을 꼼꼼히 살펴본 정국은 줄무늬가 많고 그 색깔이 뚜렷하며 겉에 광택이 나는 몇 개의 수박들을 눈으로 점찍어 뒀다. 정국은 후보들 중에서 꼭지가 싱싱한 것을 추려냈다. 세 개의 수박이 최종 후보에 올랐다. 정국은 수박을 손바닥으로 살살 두드렸다. 이렇게 두드렸을 때 맑은 소리가 나며 끝소리가 울리는 것이 가장 맛있는 수박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로 두드려본 수박의 소리는 비슷했다. 마지막, 매대의 가장 끝에 박혀있는 수박을 두드려보려 정국이 자리를 옮겼다. 수박 가까이에 귀를 대고 손바닥으로 수박을 두드리려던 정국의 움직임이 일시에 중지했다.


수박 옆 매대에 잘 익은 복숭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달큰한 복숭아 향기를 맡으면서 정국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이구. 이 총각 꼼꼼허네. 그걸로 줄까?”


수박통을 붙들고 미동도 않는 정국을 이상하게 여긴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 정국은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 직원을 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수박 말고 복숭아 주세요.”

















오늘 저녁은 카레였다.


지민이 혹시나 아침의 일로 마음이 상했을까 걱정하며 정국은 카레를 준비했다. 수저만 잘 쓰면 되는 메뉴라 정국 나름대로 배려를 한 것이었다. 한 그릇을 싹 비우고 일어나려는 지민을 정국이 저지했다. 지민이 뭐냐는 눈빛으로 정국을 올려다봤다. 정국은 방금 껍질을 벗겨 예쁘게 깎아놓은 복숭아를 지민 앞에 내려놓았다.


“후식.”


복숭아는 수줍게 속살을 드러내놓고 지민을 유혹했다. 과일이라면 질색하는 지민이었지만 요즘엔 과일보다 정국과 말 섞는 것을 질색해 어쩔 수 없이 하나라도 먹어야만 했다. 지민은 포크를 집어 들었다. 두 조각을 빠르게 해치운 지민이 정국 앞에서 보란 듯이 우물우물 복숭아를 씹어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민은 후다닥 자신의 방 안쪽으로 사라졌다.


정국은 지민이 남긴 복숭아들을 보면서 비식비식 식은 웃음을 흘렸다. 입가엔 미소가 떠 있었으나 눈은 절망으로 물들어있어 기괴한 표정이었다. 정국은 지민이 남긴 복숭아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고 식탁을 깨끗이 정리했다. 세정제로 손까지 깔끔하게 식은 정국은 부엌 찬장에서 에피네프린 주사기를 찾았다. 그리고 지민의 방문 앞으로 갔다.


철컥


역시 문이 잠겨있다. 못된 버릇하나가 또 자리 잡았구나.


정국은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예상했다는 듯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방문 열쇠를 꺼냈다. 문을 열었다. 방안에서 지민은 침대까지도 가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축 늘어져서 얕은 숨을 뱉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지민을 지켜보던 정국은 지민에게 다가가 단박에 바지를 벗겼다. 그리고 허벅지에 에피네프린를 주사했다. 몇 분 후, 지민의 숨은 안정되었지만 지민은 여전히 정신을 놓은 채였다. 정국은 지민을 안아서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아나필락시스 쇼크.


나고야로 여행을 갔을 때, 지민이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지역 특산물이라며 하도 권하는 통에 그렇게도 싫어하는 과일을 입에 넣은 것이 화근이었다. 거의 숨이 넘어가는 지민을 병원 구급차에 실으면서 정국은 통곡을 했다. 그게 겨우 몇 년 전이다.


“연기하는 거라고 말해요.”


몇 년 만에 정국은 이렇게 변해버렸다. 지민의 목숨을 담보로 지민을 시험 할 만큼 악랄하고 지독해졌다.


“나랑 헤어지고 싶어서 그러는 거죠?”


정국은 정신을 잃은 지민에게 윽박을 질렀다.


“진짜 이 방법밖에 없어요? 정말 이래야만 해!?”


지민은 복숭아를 보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싫어하는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읽히긴 했지만 딱 그 뿐이었다. 지민은 무지한 얼굴을 하고 쉽게 그것을 입안으로 가져갔다. 죽다 살아난 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절대, 절대로 못 할 행동이다.


“형이 이런다고..”


꽉 쥔 정국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형이 이런다고.. 내가 형을 놓아주겠어요?”


응? 내가 그럴 것 같아요? 형?


“아닌 거, 절대 못 그러는 거.. 잘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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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떠올리니 완결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근자감이 생겨서 용기를 내 보았읍니다.. 부디 근자감으로 끝나지 않기를 ㅇㅅ유

@mysteryhomo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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