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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seworld 3

공주의 남자 OST - 끝내









지민은 문 앞에 있다.


이상한 곳이다. 상하좌우를 구분할 수 없는 이 공간은 온통 어둠뿐이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냄새도 맡아지지 않으며, 덥지도, 춥지도,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無感의 세계였다. 발을 딛고 있는 감각조차 없으니 아마도 자신은 공간의 어느 지점을 부유하고 있나보다. …바로 이 문과 함께. 지민 앞에 문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공간을 나뉘는 벽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문만이 홀로 떠 있었다. 아니면 이 어둠이 거대한 벽이라거나…. 지민은 자신을 유혹하듯 매끄럽게 빛나는 문고리에 손을 댔다. 그리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돌렸다.


문이 열렸다.
























「흠….」


수염을 만지작거리는 아버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마 상인이 제시한 금액이 성에 차지 않아서 일 터였다. 가격을 낮게 쳐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족의 형편을 봐서 전보다 후하게 가격을 쳐준 편이었다. 지민은 초조해졌다. 만약 여기서도 말과 양을 팔지 못한다면 다음 도시까지 향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아버지가 적당히 고집을 꺾고 거래를 성사시켰으면 했으나 아버지의 마음 역시 이해는 갔다.


우기雨期가 코앞인데 마련된 식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부족의 사제가 이번 우기는 악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어 단단히 대비해야 할 거라 예언한 참이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지민의 아버지이자 부족의 족장인 철웅의 의무였다. 철웅의 주름이 깊어가는 것이 보였다. 철웅은 오랜 시간 뜸을 들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민은 혹여나 철웅이 마음을 바꿀까 급하게 거래장부를 작성했다. 상인이 작성한 거래장부와 내용을 맞추어보고 거래가 성사되었다는 증서를 남겼다. 그리고 내내 옆을 지키고 있던 부족민을 불러 상인에게 넘길 말과 양의 마릿수를 일러주었다. 아랫사람들이 실물을 교환하기 위해 빠져나가고 방안에는 상인과 철웅 그리고 지민만이 남았다. 상인이 철웅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건넸고 지민은 중간에서 통역을 했다. 이렇듯 부족 내에서 머리를 쓰는 일은 모조리 지민의 몫이었다.


지민의 부족은 월지족이 북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족의 침략으로 서천 할 때에 떨어져 나온 디아스포라 중 하나였다. 본래 월지는 흉노와 한나라 사이에 위치한 치롄산맥 일대에 거주했다. 월지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꼴이 된 연유를 알아보려면, 한 고조 유방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진나라가 멸망하고 통일 제국 한나라가 세워졌다. 한 고조 유방은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켜 진격했으나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백등산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어쩔 수 없이 흉노와 화친을 맺게 되는데, 말이 화친이지 실제로는 불평등 조약이나 다름없었다. 한은 매년 흉노에게 여자, 비단, 곡식, 술 등을 공물로 바쳐야만 했으며 만리장성을 경계로 흉노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했다. 막 나라의 기틀이 세워진 한이 대적하기에는 흉노의 위세가 무시무시하였기에 한은 굴욕적인 와중에도 흉노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힘썼다. 그러던 중 5대 문제文帝 때에 이르러 한의 국경수비대와 흉노가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흉노는 한이 조약을 어겼다는 이유를 들어 서방의 월지를 토벌 하겠다 통보했다.


그렇게 월지는 흉노에게 쫓겨 민족 대이동을 하게 되었다. 월지는 자신들의 본향인 치롄산맥을 떠나 초원과 고원 그리고 사막 등지를 돌아다녔다. 무려 한 세기를 쫓겨 다니면서 누군가는 머무르는 곳에 남고 누군가는 새로운 곳을 향해 다시 떠났다. 그 과정을 통해 월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지민의 부족은 한나라부터 시작해 치롄산맥, 대고원, 사막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각 도시의 물자들을 옮겨주는 일로 삯을 받고, 또 제 나름대로 키워낸 가축들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카라반의 성격이 강한 부족이었다. 족장의 외아들이었으나 태어나길 연약하게 태어난 지민에게 천만다행인일이 아닐 수 없었다. 흉노는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 활을 잡는다고 들었다. 아주 어린 아이들도 양을 타고 다니면서 활을 쏘고, 성인식을 치른 모든 남성들이 기병으로서 전투에 참여 한다고 했다. 지민은 스물이 넘은 지금도 칼을 드는 것이 어색하다. 사람을 죽여 본 일도 없다. 활시위를 몇 번 당기면 며칠은 근육통으로 앓아누워야만하니 흉노로 태어났다면 진즉에 버려졌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웬만한 계집아이들보다도 힘이 없어 소일거리를 맡겨도 흡족한 수준으로 해내지 못했다. 우기에 죽을 고비를 넘기는 건 예삿일이었다. 한 때는 이따위로 태어난 것을 원망만하면서 삶을 축냈던 적도 있다.


허나 도태된 채로 평생 부족의 짐이 될 수는 없는 일. 지민은 다른 측면에서 제 가치를 증명해내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지민은 머리가 좋았다. 그냥 비상한 것이 아니라 한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하는 천재였다. 한 번 본 것, 한 번 들은 것, 한 번 이해한 것은 절대로 잊지 않았다. 부족 내에서 셈을 할 줄 아는 이는 철웅과 지민뿐이었다. 지민은 대륙 내의 수십 가지 언어를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습득해냈다. 제국에서 태어났으면 재상宰相 자리까지 넘볼 수 있었겠다는 평가를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었다.


─괜찮은 거요? 황제가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또 원정대를 꾸렸다던데.


지민이 상인의 말을 옮기자 철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웅 뿐만 아니라 지민도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온 대륙에 어린 황제 정국의 악명이 드높았다.


정국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5대 문제文帝와 6대 경제景帝는 비록 흉노족에게 굴종하였을지언정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했다. 전쟁과 부역을 자제하고 나라를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힘썼다. 그 결과 한은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었다. 정국은 풍요의 시대가 도래한 한을 넘겨받았다. 평화로운 시절이 계속 되길 바라는 백성들의 기대와 달리 정국은 즉위하자마자 흉노를 토벌하는 원정대를 꾸렸다. 기병 오백여 명과 함께 출정한 정국은 첫 전투에서 삼천 명 이상의 흉노를 몰살시켰다. 이것이 정국의 나이 열여덟 때의 일이다.


정국은 흉노족을 토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동서남북으로 영토를 넓혀갔다. 특히 이민족들을 한의 깃발아래 편입시키는 데에 열중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죽어나간 사람 수가 어마어마했다. 사막의 약탈자, 전장의 살인귀, 산맥의 지배자 등… 정국을 칭하는 호칭들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정국이 그저 땅따먹기에 미친 살인광이었냐고 하면 그것은 아니다. 정국은 더 이상 흉노나 다른 이민족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한다는 자신의 신념에 지나치게 몰두했고, 그것을 이룰만한 능력이 있었을 뿐이었다. 승리하지 못하면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빼앗겨야하는 야만의 시대에서는 정국의 방식이 정석이었다.


─듣자하니 이번에는 오손과 손을 잡고 흉노를 친다합니다. 어떻게, 둘이 한 배를 탈 수 있을 것 같소?


지민이 말을 전하자 철웅이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지민도 아버지의 의견과 같았다. 오손은 선대 황제인 경제가 일곱 번이나 동맹을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했던 나라다. 새파랗게 어린 정국이 무슨 수로 오손을 설득하겠는가?


─난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건이가 아니라 황제가 직접 움직였으니. 오손왕은 허세가 심하고 대접받길 좋아하는 성정이라 들었소.


철웅은 이번에도 입을 다물었다. 지민은 상인을 향해 어색한 웃음을 보이면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국경 없이 돌아다니는 부족이 정치적인 성향을 표명한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큰 행위였다. 철웅은 족장의 덕목으로 늘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누구의 편도 들지 말 것. 둘째, 세치 혀를 조심할 것. 셋째, 호기보다는 굴종을 가까이 하되 때가 되면 용감해질 것.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이해가 갔으나 세 번째는 모르겠다고 하는 지민에게 철웅은 스스로 깨닫는 날이 올 거라는 대답을 남겼다.


「곧 비가 오겠구나.」


밖으로 나온 철웅이 하늘을 보며 한탄조로 말했다. 철웅의 말 대로 하늘에는 음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먹장구름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앞으로 서너 달은 저런 상태를 유지할 터였다. 우기가 시작되기 전 나타나는 현상이다. 구름이 하늘을 덮은 채로 석달 쯤 지나면 천둥과 번개가 인간을 징벌하듯 지상을 때린다. 마지막 경고인 셈이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난 후에야 ‘비’가 내린다.


「아직 시간이 꽤 남았습니다. 아버지.」

「그럴까? 왠지 이번 우기는 느낌이 달라. 좀 더 악하고, 좀 더 빠르게 우리를 찾아 올 것 같구나.」

「사제의 말에 너무 휘둘리지 마십시오. 그 자가 신의 뜻을 늘 올바르게 옮기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철웅이 쓰게 웃었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아무 일도….」


지민은 자신에게 암시를 걸듯이 되뇌었다.
















「네 놈들의 정체가 무엇이냐.」


지금 이 순간, 지민은 세치 혀를 조심하라는 철웅의 가르침을 순간이나마 등한시 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누군가와 말할 때 입조심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말이 가진 힘을 인식하라는 충고였다. 말로써 무엇이든 단정하지 말라. 그러면 그 반대의 일이 생기게 될 것이다. 지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 했다. 그리고 이레가 지난 후, 사막에서 정국의 군대와 마주쳤다. 오손으로 향했다던 황제가 어찌하여 그와 반대에 위치한 사막으로 행선지를 돌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마주치기만 했다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림으로써 황제와 제국에 대한 예를 다하고 복속했을 것이다. 그럼 황제도 수십 명 안팎인 소수 유목민 집단쯤이야 귀찮은 일 만들지 않고 보내주었을 것이다. 헌데, 운이 나빴다.


지민은 철웅의 옆에 바짝 엎드려 벌벌 떨고 있었다. 피 칠갑을 한 채로 말이다. 지민의 피는 아니었다. 지민은 따닥따닥 부딪치는 이를 악물고 흘긋 옆을 보았다. 눈을 부릅뜬 흉노의 머리통 수어개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참혹한 광경이 보였다. 지민은 눈을 꾹 감았다. 금방이라도 졸도 할 것 같았다.


「저희는 월지에서 떨어져 나온 유목민입니다. 보시다시피 오십이 채 안 되는 적은 인원으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옮겨 밥을 빌어먹고 살고 있습니다.」

「흉노의 정탐꾼이 아니고?」


정국 옆에 선 대장군이 비아냥댔다.


「아닙니다!」


철웅은 아니라며 절대 아니라며 자갈밭에 머리를박은 채로 부인했다. 누구도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운이 안 좋았다.’는 말로 이 참담한 상황을 표현할 길이 없다니! 지민의 부족은 사막을 지나던 도중 흉노와 마주쳤고 그들에게 투항하여 이전 도시에서 거래한 재물들을 약탈당하고 있던 중이었다. 흉노들에게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망연자실해있을 무렵, 거센 모래바람과 함께 정국의 군대가 등장했다. 흉노가 전멸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부족민들 몇도 눈 먼 화살에 맞아 목숨을 빼앗겼다. 그리고 현재, 지민의 부족은 모두 엎드린 채로 황제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충분히 오해를 살만한 상황이다. 오해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철웅을 비롯한 부족민들이 눈을 뒤집어 까고 빌면서 황제에게 목숨만 살려달라고 간청하였다. 지민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상 눈뜨고 기절한 채였다. 정신이 계속 아득해지고 이 모든 상황이 자신과 동떨어져보였다. 땀이 비 오듯 흘러 지민은 까무룩 꺼지려는  의식을 가까스로 붙잡는 데에 온 힘을 쓰는 중이었다. 모두의 부인과 애원에도 불구하고 처형결정을 내렸나 보다. 몇몇 기병들이 부족민을 향해 다가왔다. 자신을 향하고 있는 활시위도 보였다.


아, 이렇게 죽는 구나.


지민은 모든 것을 포기한 심정이 되었다. 월지 속담 중에 ‘죽음은 갑작스럽게 방문하는 이웃이다.’라는 말이 있다. 늘 우리 주변에서 살다가 예상치 못한 때에 찾아온다는 의미이다. 지민은 삶의 끝을 이상할 정도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기에 여러 번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단련된 탓일지도 모르겠다.


지민의 머리를 조준한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기 직전, 정국의 군대 가운데서 한 여자가 비명을 지르면서 튀어나왔다. 정국을 비롯한 정국의 군대는 물론이고 부족민들조차 갑작스런 여자의 등장에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여자는 광증에 걸린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정국을 향해 달려왔다. 그녀를 제지한 것은 기병들이었다. 기병들은 그녀에게 창을 가져다댔다. 여자는 흠칫해서 뒤로 물러났으나 여전히 정국에게 무언가를 호소했다. 그녀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지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답답한 여자가 자신의 가슴을 쾅쾅 쳤다. 정국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설명하라는 눈으로 대장군을 쳐다보았다. 대장군 역시 아는 바가 없다는 황망한 얼굴이었다.


「아프, 아프다고 합니다….」


그때였다. 지민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으나 정국과 대장군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정국의 시선이 동그란 머리통에 가 닿았다. 지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둘은 눈이 마주쳤다.


「…공주님이 위독하다고 합니다.」


지민은 안간힘을 짜내며 말했다. 오줌을 지릴 것 같았다. 투구에 가리고 역광인지라 정국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 형체만으로도 위압감이 엄청났다. 지민은 더듬더듬 오손의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오손의 여인은 자신의 언어를 알아듣는 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펄쩍 뛰며 공주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본래 지병이 있으신데, 아, 아니, 어렸을 적에 크게 앓으셨다가 다 나으신 병인데… 지금 갑자기 발작증상이 나타났다고… 맥이 약하다고 합니다.」


지민은 허둥지둥 여인의 말을 통역했다. 지민이 전한 내용에 정국은 인상을 찌푸리고 대장군은 탄식했다. 공주를 부인으로 삼는다는 조건을 달고 오손과 겨우겨우 동맹을 맺고 오던 참이었다. 오손왕 곤막에게 나이 찬 여식은 치희 한명 뿐이었다. 치희를 제외하고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천둥벌거숭이 뿐이니 치희가 없으면 난감했다. 아니 그걸 차치하고라도 시집보낸 딸이 갑작스럽게 죽어버리면 정국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데리고 갔던 통역관이 일사병으로 급사한 이후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치희의 몸종이 뭐라뭐라 말해도 알아들을 길이 없어 며칠 치희의 상태를 무시해왔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정국은 낭패감에 젖었다.


「오손의 말을 할 줄 아는가?」


정국이 지민에게 물었다.


「…이 세상 모든 말을 할 줄 압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참 말이었다. 지민은 이 기회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정신이 또렷해졌다. 조금 과장되게 말했으나 순 허풍은 아니었다. 지민은 부족과 거래하는 모든 나라와 민족의 언어를 할 줄 알았다.


정국은 지민을 꼼꼼히 관찰했다. 족장의 아들처럼 보이는 자가 어떤 구걸도 하지 않고 목숨을 내어놓기에 안 그래도 이상하다 생각하던 참이었다. 굳이 칼을 쓰지 않아도 스스로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간신히 숨만 붙어있던 자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면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기에 궁금증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정국은 지민이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지만 통역관이 사망한 현 시점에 유용하겠다고 판단했다. 만약 치희가 죽지 않고 산다면 말이다.


「저희 부족에 공주님과 같은 병을 앓던 자가 있습니다.」

「뭐?」

「…지금은 죽었으나」


지민은 눈 먼 화살에 죽은 부족민들 중 하나를 바라보고 다시 정국을 쳐다봤다.


「공주님과 같은 병을 앓던 자가 있어 증상을 완화시키는 약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지민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저희를 살려주신다면, 살려만 주신다면, 공주님을 치료하겠습니다.」


대장군을 비롯한 자들이 술렁거렸다. 그 중 몇몇은 당장 저 놈의 목을 베고 약재를 빼앗아오겠다고 외쳤다.


「저희는 백가지가 넘는 약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주님의 병을 고칠 약재를 어떻게 구분하시려고요.」

「우리 중에 어의가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봤나?」


정국이 시험하듯 물었다.


「어의가 있었다면 공주님이 그리되시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맞는 소리였다. 정국은 큰 전투에 나갈 때를 제외하고는 어의를 가까이 두지 않았다. 정국의 모후는 후궁 출신으로 원래 황후였던 이를 폐위시키고 새로이 황후에 오른 여인이었다. 선대왕의 장자이자 황태자였던 배다른 형과 황후는 임금의 총애를 받는 후궁의 아들이었던 정국을 경계하여 여러 번 암살을 시도했다. 정국은 어렸을 적부터 황후에게 매수된 어의들이 올린 독 탄 탕약에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자랐다. 해서 황제가 된 지금도 어의들을 멀리하며 믿지 않았다.


「또한 그 약재는 치명적인 독성을 가지고 있어 제대로 취급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습니다.」


지민은 철웅의 가르침을 곱씹었다. …첫째, 누구의 편도 들지 말 것. 한 사람과 손을 잡으면 다른 모든 이들이 적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라.


「노예로 삼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둘째, 세치 혀를 조심할 것. 말로써 무엇이든 단정하지 말라. 얄궂은 운명은 그 반대의 상황을 보내 너의 믿음을 흔들 것이니.


「다만, 살려만 주십시오.」


셋째, 호기보다는 굴종을 가까이 하되…


「약조해주시면」


때가 되면 용감해질 것.


「저도 공주님을 살려드리겠습니다.」


분명 스스로 깨닫는 날이 올 것이다.
















가시방석 위에 앉아있어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지민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너지려는 몸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사정은 치희 쪽도 마찬가지였다. 치희는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는 중이었다. 하긴 공주 신분으로 태어나서 무릎 꿇을 일이 몇 번이나 있었겠는가? 자신보다 두 배는 힘들 것이다. 지민은 포로로 사로잡힌 제 처지를 생각 못 하고 치희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정국의 막사에 불려온 둘은 부모에게 벌 받는 남매처럼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 정국이 군사회의를 마치길 기다렸다.


보름동안 정국의 군대와 이동하면서 지민은 군대의 전력과 정국의 전투 성향에 대해 파악했다. 정국은 야습에 일가견이 있었다. 첫 전투에서 오백 명의 기병을 데리고 출정해 흉노 삼천 명을 몰살시켰다는 말이 허투가 아니었다. 정국은 최소한의 병력으로 최대한의 승리를 얻는 타고난 전략가였다. 이번에 오손으로 동맹을 맺은 뒤에 바로 본국으로 향하지 않고 사막으로 발을 돌린 것도 안심한 흉노들의 허를 찌르자는 정국의 의견이었다고 한다. 잔인한 정복자지만 동시에 분명 뛰어난 왕이었다.


「둘 다 죽을상이로군.」


정국이 돌아와 지민와 치희 앞에 섰다.


「이리 보니 둘이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지민은 굳이 그 말을 치희에게 옮기지 않았다.


지민은 자신이 내뱉은 말대로 치희를 살렸다. 정국은 약조한 대로 지민의 부족을 죽이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을 노예로 삼았다. 정국은 지민에게 통역관 역할을 맡겼다. 정국이 치희를 호출하면 지민 역시 따라가서 무슨 말이든 전해야했다. 치희의 몸종인 샨은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그전까지는 치희를 굴러다니는 돌멩이만도 못하게 무시했다는 것이다. 치희가 죽을 뻔한 뒤로 정신이 들어 부인으로 대할 생각이 들었다고 치기에는 정국의 행동에 석연찮은 점이 많았다.


어찌됐든 매일 같이 불려다보니 지민과 치희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치희와 샨은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상대인 지민을 많이 의지했다. 지민은 갑작스럽게 여동생들이 생긴 기분이 들었다. 지민은 제발 아무도 죽지 않길 바랐다. 자신과 아버지 부족사람들은 물론이고 치희와 샨 또한…. 그래서 뭣 모르는 치희가 정국에게 가시를 드러내는 말을 할 때마다 알아서 순화해 통역을 하고 정국의 말 또한 치희가 상처받지 않는 선을 지켜 적당히 돌려서 전달했다. 당장 내일 죽을 지도 모르는 운명이지만 지민은 하루하루를 버티며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통역관 일은 크게 어렵지 않고 할 만 했다. 다만…


「옷을 벗고 침상에 들라.」


정국과 치희의 합방에 함께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치희는 의외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어찌됐건 정국을 지아비로 생각하니 가능한 일이었다. 첫날 밤 이후 치희에게 미안했던 지민이 자신은 전혀 정사장면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위로하듯 건넨 말에 치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왕들은 암살의 위험이 있기에 시종들이 지켜보는 데서 합방을 하는 것이 일반이라 배웠다고 그랬다. 자신은 정국과의 합방이 전혀 괴롭지 않으며 오히려 몸을 섞을 때 유일하게 정국이 무섭지 않다고 했다.


─하앗…!


하긴 여인을 품어보지 않은 지민이 들어도 정국은 밤일을 잘하는 것 같았다. 치희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치희와 정국이 질척한 소리를 내며 입맞춤을 했다. 정국이 살을 빠는 소리가 날 때마다 치희는 신음을 내질렀다. 지민은 상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지민은 그들이 올라간 침상 아래 바닥에 이마를 대고 숨을 죽였다. 다른 생각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정국의 말을 놓치면 큰일인지라 그 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정국은 정사를 나눌 때에 말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다리를 벌려.」


괴로운 것은 지민뿐이었다. 치희의 교성이 높아졌다. 정국이 치희 안으로 들어간 듯싶었다. 치희가 더, 더를 외치면서 정국을 채근했다. 지민은 차분한 어조로 치희의 요구를 옮겼다. 정국이 픽- 웃었다. 지민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네가 원하는 것을 주겠으니 몸을 열어서 나를 받아들여라.」


정국은 이미 왕자를 둘이나 두고 있었다. 제 자신도 형제를 살해하면서 왕이 되었으면서 그 운명을 자신의 자식들에게 그대로 물려주려 하는가…. 지민은 정국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척, 척, 척. 젖은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빨라졌다. 치희는 저러다가 죽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명을 내지르면서 좋아했다. 오늘따라 더 심했다. 치희가 간간히 내뱉는 더 세게! 라는 주문이 없었다면 지민은 치희가 살해당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지민은 이제 무서울 정도였다. 짐승같이 구는 둘에 대한 거부감으로 자꾸만 토기가 올라오려 했다. 가까스로 정신줄을 붙잡고 있는 중에 둘이 자세를 바꾸는 것인지 치희의 신음성이 끊겼다. 격렬한 정사에 밀려난 이불이 지민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지민은 이불을 치우지도 못하고 그 속에서 덜덜 떨었다.


「나를 봐라.」


지민이 말을 옮겼다.


「나를 보란 말이다.」


치희는 분명 보고 있다고 대답했다. 꺄악. 헉, 헉. 신음성이 지민의 귀를 찔렀다.


「날 봐!」


치희는 보고 있다고 울부짖었다. 계속 보고있지 않았냐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래서 지민은, 지민은 정국의 말이…


「고개를 들어.」


혹시나, 혹여나…


─아앙!


자신에게 하는 것이 아닐까…


「나를 봐.」


스륵. 고개를 든 지민 덕에 이불이 벗겨져 내려갔다. 지민은 이 합방에 참여한 이후 처음으로 눈을 떴다. 시야가 환해졌다. 침상에 누워있는 치희는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치희의 위에 올라타 있는 정국만이 보였다. 전장을 구르며 얻은 흉터와 근육으로 가득한 몸이 광야를 가르며 질주하는 명마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정국은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 목적지에 지민이 있었다. 둘은 눈이 마주쳤다.


「읏!」


정국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지민은 정신을 잃었다.















설산雪山.


설산을 배경으로 누군가 서있다. 희귀한 옷차림이다. 한참을 뒷모습으로 서있던 그가 산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자신이 흐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감정은 전해지는데 행동은 지민의 것이 아니었다. 입에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으나 무언가 간절하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등을 보인 이는 간절한 외침을 들리지 않는다는 양 무시했다. 그리운 등이 자꾸만 멀어졌다. 지민은 왜 우는지도 모른채 슬픔에 완벽히 동기화되었다. 관찰자이자 주인공이었다. 주인공이되 관찰자였다.
















「대체 왜 기절한 거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지민은 눈 뜨자마자 보이는 정국의 맨 가슴팍에 놀라 퍼드득 일어나려다가 정국에게 제지당했다. 정국은 지민의 어깨를 꾹 눌러 다시 눕혔다. 그리고 자신도 지민 옆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누웠다.


지민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 치희와 정국의 합방에 불려왔었다. 거의 고문을 받는 기분으로 둘의 정사를 듣다가… 정국이 자신을 보라했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고… 눈이 마주쳤고… 그리고… 기절했다. 그리고 지금은 정국의 침상 위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치희는 어디로 사라지고 내가 여기에 자리를 차지하고 누운 것일까? 지민은 저도 모르게 자신이 옷을 입고 있는지 살폈다. 옷고름이 조금 풀어진 걸 빼놓으면 다행히 들어올 때와 같은 상태였다. 정국은 지민의 하는 양을 보고 살짝 기분이 상했다. 내가 겁탈이라도 한 줄 알았단 말인가?


「대체 왜 우는 거야?」


정국의 물음에 지민은 의아해하면서 제 얼굴을 매만졌다. 얼마나 울어댄 것인지 얼굴이 흠뻑 다 젖어있었다. 지민은 당황해서 정국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지민의 눈에 가득 차 있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아….


정국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철퇴로 얻어맞는다면 이런 기분이 들까? 지민의 눈물에 정국은 잠깐동안 오장육부가 다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감정이었다.


「꿈을 꿨습니다.」


벙쪄 버린 정국을 두고 지민이 자기변호를 했다. 혹여나 자신이 기절하고 운 일로 부족이나 치희가 화를 당할까봐 걱정어서였다.


「무슨 꿈이길래? 슬픈 꿈이었나 보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다는 건 뭐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지민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국은 지민이 한 말을 떠올렸다.


「이 세상 모든 말을 다 안다고 하지 않았나? 내게 거짓을 고한 것이냐.」


지민은 당황해서 부인하고 싶었지만 부정 할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언어였습니다.」

「그래? 뭐라고 하였는데.」


지민은 꿈에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흉내내기 위해 입을 오물거렸다. 이렇게, 이렇게 발음 하였는데…


“정국아.”


지민이 정국을 쳐다봤다.


“가지마.”


정국의 표정이 굳었다.


“정국아. 가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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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쓰면서 와 이건 아니다 너무 설명충이다라는 생각 천만오백번쯤 했네요...ㅠ

실제 역사에 제 맘대로 설정을 잔뜩 쏟아 부운 팩션입니다ㅎ 팬픽은 모든 게 가능해!! 존나 몰르겠어!!<= 이상태로 씀..

이러쿵 저러쿵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지만.. 완결을 낸 뒤에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당...........ㅠㅠ 정말 끝 편에는 이해가.. 이해가 가시게.. 꼭.. 꼬옥.....(손을 잡는다...

진짜 쓰고 싶었던 소재인데 역쉬 제 맘대로 되지 않는 인생사^ㅁ^!

다음 편은 좀 더 빨리 가져오도록 노력할게요~!

주중에 올릴 수 있으면 좋을텐데 자신이 없네윰ㅠ 회사^^ㅣ발 것..


@mysteryhomo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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